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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09 17:44 수정 : 2005.01.09 17:44



△(좌로부터) 이거룡 동국대 연구교수(인도철학)·베단타철학, 인도문화, 불교학 등 연구·저서: <아름다운 파괴> <이거룡의 인도사원 순례> <두려워하면 갇혀버린다> 등 손동철 경북대 교수(물리학)·경북대 고에너지물리연구소 소장, 국제 입자물리실험에 다수 참여·중성미자-중수소 충돌실험과 참 쿼크 연구, 양전자-전자 상호작용과 새로운 입자 탐색

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

①신화와 우주론
②유전자복제
③뇌는 마음을 얼마나 알까
④인간과 로봇, 몸의 철학
⑤인간, 동물 그리고 진화
⑥동양철학의 디지털문명답사
⑦우주개척시대, 지구 밖 인간의 존재
⑧나노과학과 미시역사의 눈
⑨수학과 미술의 물음, 아름다움이란
⑩세계와 입자의 근원

이상하다. 입자물리학자 손동철 경북대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 내 머리 속에는 온통 십(10)의 마이너스 십팔(-18) 승이라는 숫자가 맴돌고 있었다. 나는 숫자를 싫어한다. 두려워한다. 이상한 부호와 수식이 끼어드는 학문을 기피한다. 그런데 물리학자를 만나야 한다. 그것도 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십의 마이너스 십팔 승이라는 숫자를 아이 이름 부르듯 예사로 거론하는 입자물리학자이다. 이럴 때는 돌아서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으로 배수의 진을 치는 수밖에 없다.


현전의 여백에 숨겨진 부재의 흔적을 쫓는 철학자의 습성 탓일까? 미시물리학자의 연구실에 앉아서도 나는 부지런히 십의 마이너스 십팔 승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미시’ 냄새를 풍기는 곳은 없다. 하긴 그렇다. 십억 분의 일 미터가 어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인가? 차가 나왔다. 서로 다른 대상과의 만남에 이해의 지평을 맞추자는 매개물이다. 한 공간에 이질적인 요소들이 놓이는데 따른 반작용을 줄이자는 노력이다. ‘찻잔 따로, 마시는 사람 따로’이지만, 한 공간에서 함께 마시면 쉽게 하나가 된다.

우주 구성하는 가장 작은 것 찾는
입자물리학 실험과정은
개념 나누는 철학적 사유와 유사
질량 비밀 풀 힉스입자 발견해도
‘시작없음’계속되는 건 아닐까

● 손 교수의 연구실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세상 얘기를 한 뒤 곧장 실험실로 안내되었다. 투박하다. 그 흔한 테크노 칼라는 아예 찾아보기 어렵고, 여기 저기 전선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품이 흡사 시골 읍내 라디오 수리가게 같다. 책상 위에는 세련되지 못한 쇠토막 몇 개를 테이프로 감아 만든 투박한 장치가 놓여 있다. 뭐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입자를 붙잡는 장치란다. 저 투박한 장치로 과연 수억 광년을 여행하여 지구에 도달한, 그 작디작은 입자를 잡는다니 다만 놀라울 따름이다.

투박한 실험실의 이미지와는 달리, 입자물리학은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세계를 가장 잘게 쪼개어 연구하는 분야이다.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알갱이들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우주의 기원을 규명하는 학문이 곧 입자물리학이다. 물론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알갱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그야말로 ‘오래된 미래’의 질문이다. 이미 기원전 천년 경 고대인도 종교문헌들 속에도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은 알갱이’에 대한 물음이 등장한다.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아야 모든 것 속에 스며들 수 있다는 생각도 보인다.

‘태초’일까‘한 처음’일까

인간의 지적 탐구가 여러 갈래의 학문 분야로 갈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주의 기원에 대한 물음은 주로 철학자들의 상상력과 직관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중세 서양의 경우에는 신이 무(無)로부터,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우주관이 지배했다. 이에 비하여 인도를 비롯한 동양의 사유에는 오히려 유(有)로부터의 세계 전개가 현저했다. 고대 인도인들은 브라흐만(우주의 궁극적 원인)의 세계 전개를 마치 거미가 제 몸에서 실을 내어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태초’를 전제로 하지만, 유로부터의 전개는 다만 ‘한 처음’을 상정할 뿐이다. 태초를 전제로 한 세계관은 역사의 흐름을 직선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에 한 처음을 상정하는 세계관은 역사를 순환하는 것으로 본다.

▲ 인도철학자 이거룡(왼쪽) 교수와 입자물리학자 손동철 교수가 대구 경북대 안 손 교수의 연구실에서 만나 간단한 구조의 입자 검출장치 앞에서 세계를 이루는 물질의 근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대구/임종진 기자
● 근대에 들어 우주의 기원에 대한 물음은 자연과학자들의 몫이 되었으며, 입자를 보다 작은 입자로 부수는 실험은 우주의 기원을 추적하는 핵심이 되었다. 손 교수의 설명을 듣자면, 입자를 부수는 데 사용되는 고에너지 입자가속기는 현대 입자물리학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로 분자는 원자로 부서지고, 원자는 다시 원자핵과 전자로 부서졌으며,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부서졌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다시 쿼크라는 알갱이로 부서졌다. 쿼크는 지금까지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은 알갱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연구대상을 쪼개고 또 쪼갠다는 점에서 입자물리학의 실험과정은 철학적 사유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입자물리학자가 고에너지 입자가속기를 이용하여 입자를 쪼개고 또 쪼개는 것처럼, 철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구성하는 개념들을 쪼개고 또 쪼갠다. 쪼개는 목적이나 동기도 비슷하다. 가장 작은 입자라고 믿었던 입자가 그 보다 더 작은 입자로 쪼개질 때, 물리학자는 물질의 근원에 한 걸음 더 다가선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개념이 더 세밀한 개념으로 쪼개질 때, 철학자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다. 개념이 쪼개질 때마다 사실은 점점 더 개념의 장막에 갇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문 안에서는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말라.” 절집의 일주문에 적힌 말이다.

[큰 이미지보기]



● 1995년 탑 쿼크의 발견으로 여섯 가지의 모든 쿼크가 밝혀졌으며, 이를 토대로 이른바 표준모델이 완성되었다. 멘델레예프가 원자의 주기율표를 만든 지 126년 만에 두 단계나 작은 기본입자들의 주기율표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기원에 대한 신비는 여전하다. 표준모델 속의 기본입자들이 어떻게 질량을 지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힉스입자’라는 또 다른 입자의 발견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입자물리학자들의 예견이 빗나가지 않는다면, 힉스입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면 우주 생성의 근원이 새롭게 밝혀질 것이다. 물리학 분야의 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힉스입자는 단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그야말로 추상적인 입자일 뿐이다. 사실 손 교수를 만나기 전부터 나는 ‘예습’을 통하여 힉스입자에 어떤 혐의를 두고 있었다. 힉스입자는 태초의 환경을 재연할 때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는 ‘신의 입자’다. “힉스입자를 신의 입자라고 부르는 것은 혹 신만이 입자들의 질량을 결정한다는 의미는 아닌지요?”

쿼크보다 작은 것 있을수도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에 어떤 편견이 끼어드는 것을 가장 경계합니다.” 순전히 상상력과 느낌에 근거한 나의 질문에 대한 손 교수의 대답이다. 과학자는 실험과 검증을 통해서만 세상의 진실을 믿는다는 말일 것이다.

● 힉스입자는 여러 면에서 인도사상의 ‘마야’ 개념을 연상하게 한다. 브라흐만은 마야를 통하여 질량을 지니는 시공간의 세계로 그 자체를 현현한다. 말하자면, 마야는 세계의 궁극적 원인인 질량을 얻는 매커니즘인 셈이다. 마야는 존재, 비존재, 또는 존재인 동시에 비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언표 불가능한’ 어떤 것이며, ‘참된 것을 가리는 동시에 헛것을 투사하는’ 본질을 지닌다. 세계의 궁극적 원인은 언제 어떻게 마야를 통하여 질량을 지니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만 ‘시작 없음’이라고 답할 뿐, 더 이상 묻거나 답하지 않는다. ‘멈추어 설 줄 아는 자의 지혜’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감히 알음알이로 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머잖아 입자물리학자들은 힉스입자의 정체를 규명할 것이다. 누가 아는가? 힉스입자의 발견으로 마야의 정체가 한 거풀 더 벗겨질지, 또는 힉스입자 또한 ‘시작 없음’의 무한소급으로 통하는 틈새에 불과한지, 누가 아는가? 지금까지 ‘가장 작은 알갱이’들의 운명이 그랬듯이 쿼크 또한 그보다 더 작은 알갱이로 부서질지, 이 또한 누가 아는가? 이거룡 교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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