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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과 이영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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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전강수 교수, 뉴라이트 대부 안병직과 이영훈 정면비판
필자는 뉴라이트 운동의 대부 안병직 교수의 제자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와는 안병직 교수 아래에서 동문수학했다. 2005년경부터 시작된 이영훈 교수의 역사 교과서 비판은 지금 청와대가 밀어붙이고 있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진원(震源)이다. 근원을 파헤치지 않으면 잘못을 바로잡기 힘들다는 마음에서 스승과 선배를 정면 비판하는 부담을 감수하고자 한다. 안병직 사단과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 안병직 선생. 대학 시절 내내 가슴을 뛰게 만든 이름이다. 박정희 독재가 절정에 달하고,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숨이 막혀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던 시절에 안병직이라는 이름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도 같았다. 그의 책 <3.1운동>은 정의에 목마른 대학생들이 어렵게 구해 읽던 재야 교과서였고, 그가 <창작과 비평> 등에 기고한 한용운, 신채호 관련 논문들은 암울한 시대를 비춘 한 줄기 빛이었다. 암울했던 시절 안병직 선생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였다. 수많은 서울대 학생들이 그의 문하로 집결했다. 학부생들은 직간접으로 그의 지도를 받아서 험난한 삶을 선택했고, 대학원생들은 그를 닮은 지식인이 되고 싶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했다. 그가 대학원 강좌를 개설하면, 경제학과는 물론이고 국사학과나 사회학과 등 인근 학과의 대학원생들도 수강 신청을 하는 바람에 수십 명이 한 세미나실에서 수강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선생의 전공 분야는 한국경제사였다. 요즘은 여러 대학에서 강좌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이 분야를 전공하려고 한 해에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 신입생 40명 중 절반이 그에게 몰려들기도 했으니, 당시 그의 영향력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당히 박정희·전두환 독재에 맞서는 결기와 함께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연구 열정을 품고 제자들을 지도했던 안병직 선생, 그 시절 그는 나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사표(師表) 그 자체였다. 안병직 사단, 사람들은 그의 제자 그룹을 이렇게 불렀다. 안병직 사단의 멤버들은 경제학에서 변방 중에 변방인 한국경제사를 전공하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남들이 가지 않는 좁은 길을 존경하는 스승과 함께 걷는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며 공부에 매진했다. 안병직 사단에는 수제자라 부를 만한 인물이 몇 명 있었다. 지금 서울대 경제학부에 재직하고 있는 이영훈 교수는 그 중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시대 사료들을 몽땅 다 읽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사료가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찾아가서 직접 확인할 정도로 철저하기도 했다. 내 개인에게 그는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기 어려운 하늘같은 선배였다. 뉴라이트 운동과 이영훈 교수의 역사 교과서 비판 그런데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었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시초는 1980년대 후반 일본 동경대학의 초청으로 2년간 일본에서 연구하고 돌아온 안병직 선생이 식민지 시대에도 조선인 노동자의 성장이 있었다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현대 한국경제와 관련하여 중진자본주의론을 설파하는 논문을 집필하기도 했다. 중진자본주의론이란 한국경제가 이미 자립경제를 달성하고 중진국 단계에 들어섰으며 조만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었다. 이런 선생의 변신(나중에 선생은 이때 연옥을 통과하는 고통을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에 대해 가장 강하게 반발했던 사람이 이영훈 교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안병직 선생이 기존 식민지사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한 부분을 새롭게 조명하는구나 생각했지, 식민지 근대화론을 피력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 선생은 단지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의 성장이 있었다는 주장을 넘어서 일제의 식민지 개발이 해방 후 한국 고도성장의 물질적 기초가 되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한국의 캐치업(catch-up) 과정을 순조롭게 해서 고도성장을 견인했다는 개발독재 미화론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노무현 정부 시절 뉴라이트 재단을 만들어 극우 성향의 정치운동을 펼치면서 이명박 정권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초기에 약간 갈라진 길이 이렇게 큰 간격을 만들 줄은 정말 몰랐다. 안병직 선생의 뉴라이트 운동이 ‘성공’을 거두게 된 배경으로 이영훈 교수의 ‘맹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선생이 변신의 조짐을 보이던 초기에 극력 반발했던 이영훈 교수는 금세 입장을 바꾸어 스승의 견해를 전폭 수용했고, 2002년 서울대 경제학부로 자리를 옮긴 후부터는 한번 수제자는 영원한 수제자라는 듯이 스승을 능가하는 뉴라이트 운동가로 자리매김했다. 작금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의 진원(震源)은 이영훈 교수가 주도했던 교과서포럼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비판이었다. 2006년 11월 교과서포럼이 개최한 한국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 관련 심포지엄에서 안병직 선생과 이영훈 교수가 4.19 관련 단체 회원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뺨을 얻어맞고 질질 끌려 나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면서 나는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마치 못난 아버지와 형님이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가 낭패 당하는 꼴을 지켜보는 심정이었다. 그 어려웠던 시절 기개를 지키고 민주주의와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대열의 최선봉에 섰던 두 분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황당한 생각을 품은 확신범으로 바뀌어서 저토록 험한 일을 겪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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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25일 오전 서울 정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한국 근ㆍ현대사’ 공식 출간과 관련해 기자회견이 열렸다. 가운데 마이크를 잡은 이영훈 교수.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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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수 대구가톨릭대 부동산통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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