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22일 오전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택(오른쪽 건물)의 이웃 주민들이 조기를 내걸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
1970년 40대 기수론으로 전면등장
박정권·신군부 체제서 민주화 투쟁
대중지지 힘입어 잇단 대통령 역임
제왕적 권력…임기말 자식들 구속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나라에서 ‘양김씨’로 불렸던 대중 정치인의 시대가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야당의 역사는 1955년 9월 출범한 민주당에서 출발한다. 민주당에는 한민당과 민국당 출신의 ‘구파’, 새로 창당에 참여한 ‘신파’가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구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신파였다.
두 사람은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으로 전면에 등장한 이후 30년 동안 우리나라 정치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970년대에는 대선후보, 야당 총재, 재야인사로 신분을 바꿔가며 함께 반독재 투쟁을 펼쳤다. 두 사람의 투쟁은 결국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앞당겼다.
1980년 신군부 쿠데타와 전두환 정권 출범 뒤 두 사람은 각각 미국과 국내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목숨을 건 단식과 목숨을 건 귀국을 감행했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과 직선제 개헌이라는 결실을 이끌어냈다. 두 차례의 군사 쿠데타로 더럽혀진 우리나라 헌정사가 민주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데는 양김씨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
|
22일 오전 경남 거제시 장목면 대계마을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에 걸려 있는 김 전 대통령 사진을 관계자들이 내리고 있다. 이 사진은 이 지역 분향소에 영정으로 걸렸다. 거제/연합뉴스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