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05 22:15
수정 : 2018.01.05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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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9년 3월14일 경북 포항에서 한·미 해병대 2개 사단이 참가한 가운데 실시된 ‘팀스피릿 89훈련’에서 한국 해병들이 수륙 양용 장갑차로 상륙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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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사찰 놓고 북·미 갈등 빚다
팀스피릿 중단 제안에 사찰 수용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채택
남북 고위급회담 8차례 이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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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9년 3월14일 경북 포항에서 한·미 해병대 2개 사단이 참가한 가운데 실시된 ‘팀스피릿 89훈련’에서 한국 해병들이 수륙 양용 장갑차로 상륙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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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한-미 연합군사훈련 연기’ 합의는 파격이다. 한·미가 정치적인 이유로 연합훈련을 중단하거나 연기하는 등 일정을 조정한 전례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1992년 ‘팀스피릿’ 훈련 중단이 거의 유일하다. 당시 팀스피릿 훈련 중단 결정과 재개 선언이 한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면, 이번 ‘키리졸브’와 ‘독수리훈련’ 연기가 향후 한반도에 미칠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다.
1992년 팀스피릿 훈련 중단 결정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사찰을 둘러싸고 북-미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하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북한은 198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으나, 의무적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안전협정 서명과 사찰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가 1991년 12월 “북한이 핵안전협정 서명과 상호 시범사찰의 수락 의사를 밝히면 1992년 봄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하겠다”고 제안하자, 북한이 외무성 성명을 통해 “사찰을 받겠다”고 수용한 것이다.
이에 남북은 그해 12월31일 제5차 남북 고위급회담을 열어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가서명했고, 92년 2월19일 공식 발효됐다. 한·미 군당국은 이듬해 봄 열릴 예정이던 팀스피릿 훈련을 취소했다. 북한도 92년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안전조치 협정 비준에 동의했고, 국제원자력기구는 그해 6월부터 북한의 핵시설을 사찰하기 시작했다. 남북 대화도 활기를 띠었다.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고위급(총리) 회담은 8차례 이어졌고, 92년은 분단 이후 남북회담(88회)이 가장 많이 열린 해가 됐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의 북한 핵사찰 과정에서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자, 한·미 국방부 장관은 이를 빌미로 92년 10월 ‘연례 안보협의회의’(SCM)에서 “1993년 3월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한다”고 전격 결정한다. 남북관계가 한순간에 얼어붙고 한반도 긴장은 극적으로 고조됐다.
북한은 93년 3월 팀스피릿 훈련이 실제 재개되자, 전국에 ‘전시 준비태세’ 돌입 명령을 내리고 핵확산금지조약 탈퇴와 국제원자력기구 안전조치협정 파기를 선언했다. 이른바 ‘1차 북핵 위기’다. 공교롭게도 한국에선 노태우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로, 미국에선 부시 행정부에서 클린턴 행정부로 넘어가는 미묘한 권력교체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후 25년가량 한반도에는 북핵 문제가 짙게 드리워졌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도널드 그레그는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에서 “딕 체니 국방부 장관이 국무부나 나하고는 의논조차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라며 “내가 대사로 봉직하던 기간 중에 미국이 결정한 유일한 최악의 실수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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