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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을 일주일여 앞둔 18일 오전 경기 파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개보수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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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공간으로 본 남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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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을 일주일여 앞둔 18일 오전 경기 파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개보수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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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만에 다시 열리는 2018년 남북정상회담은 판문점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분단체제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은 한반도,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체제를 여는 문이 될 수 있을까? 역사학자 신주백 연세대 인문한국(HK) 연구교수가 미국 국립문서관리기록청(NARA)에서 새롭게 찾아낸 사진들과 함께, 판문점이란 공간에 주목해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를 짚는 글을 보내왔다.
판문점의 탄생, 주막의 변신
판문점이란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이 함께 관리하는 공동경비구역(JSA)을 한데 묶어 부르는 말이지 특정 건물의 명칭이 아니다. 판문점은 서울로부터 서북쪽으로 62㎞정도 떨어져 있다.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판문점을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 이북은 개성직할시 판문군 판문점리에 속한다. 하지만 군사지역이어서 지적도가 없는 이남은 파주시 진서면 어용리, 또는 군내면 조산리라고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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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멈추기 위한 첫 예비회담은 1951년 7월부터 개성에서 열렸다. 담배를 피우며 예비회담장 근처를 걷고 있는 북한군 남일 대장의 모습. 신주백 김천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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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멈추기 위한 첫 예비회담은 1951년 7월8일 개성에서 열렸지만, 그 해 10월28일부터 1953년 7월27일 유엔군, 북한군, 중국군이 정전협정에 서명할 때까지 회담은 판문점에서 열렸다. 원래 널문다리(板門橋)가 있고 널문리의 주막이 있던 곳에 세운 회담장을 한문으로 판문점(板門店)이라 하였다. 회담장에 오는 중국 대표에 대한 배려였다. 판문점 일대는 중립지대여서 적과 아를 구분하지 않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군측은 회담이 진행되는 도중에 그곳을 ‘평화캠프(peace camp)'라 불렀다. 그 옆의 38선에서는 산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양측이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있는 와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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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상이 벌어지던 곳은 ‘중립지대’로서 적과 아군이 자유로이 지나다닐 수 있었다. 1951년 10월께 예비회담장이 있던 개성 근처에서 미군과 공산군이 함께 폭탄 조사 및 제거 활동을 벌이고 있는 모습. 신주백 김천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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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서 처음 시작된 정전협상은 1951년 10월28일부터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1953년 7월27일까지 계속됐다. 중립지대임을 알리기 위해 띄운 열기구와 그 아래 판문점 일대의 전경.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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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 장소로 사용할 때만 해도 판문점은 임시장소였다. 그곳에 가건물을 짓던 군인들도 현지의 주민들에게 ‘회담이 끝날 때까지 한 달만 나가 있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주민들은 집문서를 항아리에 담아 땅 속에 묻어 두고 옷가지만 몇 점 챙겨든 채 마을을 나왔지만, 그게 고향에서의 마지막이었다.
회담 기간 미국 제5공군 조종사들은 바빴다. 회담 진행경과를 도쿄에 있는 유엔군사령부에 직접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UP통신, AP통신 등의 기자와 사진작가를 태운 특별열차가 판문점까지 운행된 때도 있었다. 기차에는 간단한 ‘뉴스 편집실(city room)’도 있었다. 그때도 한반도 문제는 세계의 이목을 모은 이슈였던 것이다.
휴전회담은 예비회담을 포함하여 2년 19일 동안 1076회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회담이 있었음에도 정작 한국군은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판문점도 우리가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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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7월께 열린 정전협상의 휴식 시간에 미군들과 함께 <타임> 잡지를 읽고 있는 북한군의 모습.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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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한반도형 분단체제의 응결점
판문점이 있는 공동경비구역은 중립지대이므로 군사분계선이 없고, 유엔사 군인과 북한군이 자유로이 다니는 공간이었다. 장교만이 권총을 찼고, 나머지는 총기를 휴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76년 판문점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8·18판문점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 북한군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있는 미루나무의 가지치기 작업을 경비하던 유엔사 소속 군인을 공격하며 미국 장교 2명을 살해하고 미군과 한국군 6명을 다치게 한 것이다. 일본에서 휴가 중이던 주한미군 사령관이 여객기 대신 전투기 뒷좌석에 앉아 돌아왔을 정도로 상황이 긴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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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7월께 미국 제5공군 소속 제임스 맥마스터 소령(오른쪽)이 개성의 예비회담장에서 서울까지 운행하는 특별열차 안에 설치된 ‘뉴스편집실’(city room)에서 유선으로 정전협상 내용을 보고하고 있는 모습. 그 옆에는 밥 밀러 기자(UP)와 로버트 터크만 기자(AP)가 맥마스터 소령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당시 한반도 문제는 세계의 이목을 모은 이슈였다. 신주백 김천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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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한반도에서 데탕트 분위기를 소멸시키고, 유엔총회에서 매년 논의되던 ‘한반도 문제’라는 의제를 사라지게 했다. 판문점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오늘날 언론을 통해 흔히 접하는 모습인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양측의 경비대원이 서서 경비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던 북한군 경비초소 4개가 철거되고,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 안의 책상에도 군사분계선이 표시되었다. 병사들도 무장하였다.
총을 들었으니 언제든지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1984년 11월 첫 사달이 났다. 소련인 관광안내원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탈출하였다. 탈출자를 추격하러 150m까지 내려온 북한군과 유엔군이 총격전을 벌였다. 한국 육군 카투사 1명과 북한군 3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도 발생하였다.
당시 판문점에는 정전협정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를 감독하고 위반한 사건을 협의하여 처리하기 위한 기구로 북한과 유엔사 대표가 참가하는 군사정전위원회(MAC)와 4개국의 중립국감독위원회(NNSC)가 있었다. 하지만 38도선에서의 긴장만큼이나 불안정한 이 기구들은 무력충돌을 막을 수 없었다. 중립국감독위원회는 1957년 6월부터 기능이 정지됐고, 군사정전위원회는 1991년 2월 제459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유엔사에서 한국군 장성을 수석대표로 임명하자 북한측이 회의를 거부했고, 중국측도 1994년 파견 위원을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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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5월29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460차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 모습. 이때부터 북한의 불참으로 군사정전위원회는 유명무실해졌다. 출처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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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난감한 사건이 일어났다. 1994년 12월 주한미군 헬기가 북한에 불시착한 것이다. 판문점에 대화창구가 사라졌으니, 미국정부로서는 국무부 부차관보를 평양에 보내야 했다. 이 사건은 전쟁과 평화가 모두 유보된 불확실성을 그나마 공동으로 관리할 수 있는 핵심 공간이 판문점임을 증명한다. 더 나아가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기구가 만들어져 정전협정을 대체할 때까지 판문점을 통한 대화창구를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판문점의 변신, ‘숨구멍’에서 시작되는 창대한 역사
실제로 판문점은 한반도 분단체제의 ‘숨구멍’이었다. 1968년 1월 미 해군 소속의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됐을 때, 미국은 한국 정부를 배제한 채 판문점에서 11개월 동안 비공개 협상을 벌였다. 냉전시대 양측의 첫 회담 장소가 판문점이었던 것이다. 남북한 정부 차원의 첫 공식 만남도 판문점에서 있었다. 비록 20여분 동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남북한 적십자 회담을 준비하는 첫 접촉이 1971년 8월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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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부 차원에서의 첫 접촉도 판문점에서 있었다. 1971년 8월28일 남북 적십자 회담 예비접촉이 판문점에서 이뤄지고 있는 모습. 출처 대한뉴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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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구멍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針孔爲風能殺人)’는 말처럼, 앞으로 판문점은 한반도 문제에 새로운 미래를 여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마치 에도막부의 쇄국시대에 나가사키 앞바다의 인공섬 데지마처럼, 그리고 냉전시대 미국의 봉쇄 속에서 중국이 세계와 소통하는 창구였던 홍콩처럼.
그러나 숨구멍은 우연히 커지지 않는다. 한반도호라는 미래행 열차가 달리 수 있는 레일을 깔도록 노력해야 겨우 가능하다. 우리는 그렇지 못한 쓰라린 경험을 한국근현대사에서 세 차례나 경험했다. 불평등한 자본주의 질서에 준비없이 편입당한 1876년의 개항이 그렇고, 대한제국이 일본의 세력권에 편입된 러일전쟁의 마무리가 그러했다. 독립도 하기 전에 연합국이 결정한 신탁통치는 결국 분단으로 이어졌다. 남이 깔아 놓은 레일 위를 달릴 수밖에 없었던 결과는 식민과 분단이었다.
한국전쟁은 식민과 분단을 분단체제로 바꾸었다. 그리고 70여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상황은 바뀌지 않고 있다. 한국 사회는 바꾸지 못한 현재를 부끄러워하거나 제대로 반성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한때는 대박을 꿈꾸며 분단비용과 삶의 질보다 통일비용을 걱정했다. 국민에게 분단극복이 희망보다 부담으로 다가오게 했다.
분단체제는 누구도 허물어주지 않는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은 한반도 분단체제를 허물어뜨리는 시작이며 마무리이다. 협력의 과정에서 다자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야 한반도 문제가 안정된 국면에 들어설 수 있다. 협정의 교체 과정은 한반도를 둘러싼 다자간 관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이므로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도 그려볼 수 있다. 오늘, 판문점에서 이제 그 창대한 역사가 시작된다. 한반도에 봄이 오게 하자.
신주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인문한국(H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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