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7.28 19:31
수정 : 2017.08.21 10:41
슬라보이 지제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 교수
트럼프와 클린턴 중에 누가 더 나쁘단 말인가? 스탈린의 말을 비틀어 인용해보면, 둘 다 더 나쁘다. 민주·공화 양당 내 강력한 분파들은 자신의 정당에서 지명되는 후보를 지지해야 할 의무감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클린턴이 공화당의 지지를 업고 트럼프는 좌익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받는 이 난국이야말로 사태의 진실이다.
미국 대통령선거 예비경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가 거둔 예상 밖 성공에 대해 공화당과 민주당 주류가 보이는 반응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들의 성공이 우리 민주주의의 위기를 입증하는 것이며 어떻게든 통제하고 억제해야 하는 하나의 비정상성이라는 것 등등이다. 이런 반응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우리 민주주의는 정치적 기득권 세력이 적절하게 통제할 경우에만 용납된다. 또는 노엄 촘스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 명예교수가 연전에 말한 대로 “민주주의의 형식이 안전하게 고려될 때는 민중이 참여할 위험성이 극복되었을 때뿐이다.”
20세기 미국 저널리즘의 대명사인 월터 리프먼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자기 이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이었지만(소련에 대한 공정한 정책을 옹호하는 등), 그가 내놓은 대중매체에 관한 이론은 서늘한 진리 효과를 지닌다. 그는 ‘동의의 조작’(Manufacturing Consent)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나중에 노엄 촘스키가 써서 유명해진 개념인데, 애초 리프먼의 의도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여론>(1922)에서 그는 “지배 계급”은 도전에 대처해야 한다고 썼다. -그는 플라톤처럼 대중을 “국지적 여론들의 혼란” 속에서 허우적대는 덩치 큰 야수 또는 어리둥절한 무리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 시민 무리는 “국지성 너머에 이해관계가 있는 특별한 계급”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이 엘리트 계급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결함, 즉 “전능한 시민”이라는 불가능한 이상을 포위해서 물리치는 지식의 기계로서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민주주의가 -우리의 동의를 얻어- 작동하는 방식이다. 리프먼의 말에 무슨 비밀은 없다. 자명한 사실이다. 신기한 일은 우리가 그것을 알면서도 경기에 참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자유로우며 또한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하는 듯 행동하지만, 은연중에 (우리의 언론자유라는 바로 그 형식 안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라는 명령을 받아들이거나 심지어는 요구하기까지 한다. 오래전에 마르크스가 간파했다시피 비밀은 형식 그 자체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에서는 보통 시민 하나하나가 사실상 왕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왕은 입헌 민주주의의 왕과 같아서 그의 결정권이란 형식에 지나지 않고, 다만 행정 관료들이 제시한 법안에 서명을 하는 것일 뿐이다. 이 때문에 민주적 절차의 문제는 입헌 민주주의의 커다란 문제와 동일한 것이 된다. 즉 왕의 권위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실제로 왕이 결정한다는 외양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우리 모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직면한 슬픈 곤경은 이런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정말로 작동하고 유권자들이 진정한 선택을 하게 되는 드문 계기들이 오히려 민주주의의 위기로 간주된다는 것. 우리의 제도화한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종종 규칙으로서의 선거가 진정한 선택지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대체로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 사이의 선택인데 그 둘은 거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리스 유권자들은 제대로 된 선택지를 부여받았다. 한쪽에는 기존 체제가, 다른 한쪽에는 시리자(급진좌파연합)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그러하듯, 그처럼 진정한 선택에 직면하는 순간은 기존 체제를 공황 상태로 몰아넣는다. 기득권 세력은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그릇된 선택이 이루어질 경우 그것을 사회적 혼란과 가난, 폭력의 이미지로 채색한다. 시리자가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세계 전역의 시장에 공포의 물결이 밀어닥쳤고, 그런 경우 늘 그렇듯이, 이념적 의인법이 절정을 구가했다. 시장이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 발언하기 시작했다. 선거에서 재정 긴축 계획을 지속할 수 있는 정부를 출범시키지 못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우려”를 시장의 이름으로 표한 것이다.
그리스 총선에서 시리자가 승리한 것에 대한 유럽 기득권 세력의 이런 반응에서 하나의 이상이 서서히 부상했다. 기디언 래크먼이 <파이낸셜 타임스>(2014년 12월19일치)에서 적절히 표현한바 “유로존의 가장 약한 고리는 유권자들”이라는 것이 바로 그 이상이다. 이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유럽이 이 “약한 고리”를 끊어내고 필요한 경제 조처를 직접 취할 힘을 전문가들이 획득하게 된다. 선거라는 것의 기능은 단지 전문가들의 합의를 확정하는 것일 따름이다. 대중의 여론에 대한 이런 불신이 양날의 칼을 지닌다는 사실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것이 기존의 자유주의 체제에서 용인 불가한 것으로 판단되는 반이민 포퓰리즘 역시 겨냥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공화당 우파가 공황에 빠지는 것이 그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진짜 문제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입장 자체의 취약성에 있다는 것이다. 다수 대중이 “합리적인” 자본주의 선전에 먹혀들지 않고 포퓰리즘적 반(反)엘리트주의 입장을 추인하는 쪽으로 훨씬 더 경도된다는 사실을, 하층 계급의 원초주의의 증거로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포퓰리스트들은 이 합리적 접근법의 불합리성을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며, 불투명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규제하는 얼굴 없는 제도들을 향한 그들의 분노는 전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이것이 정말 트럼프를 반기득권 세력 후보로 만드는 것일까? 트럼프의 “신선한” 도발과 조야한 감정 분출이 뻔한 강령을 감추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는 쉬운 노릇이다. 그가 감추는 진짜 비밀은, 만일 기적적으로 그가 선거에서 승리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샌더스의 경우와는 다른데, 이 민주당 좌파는 평범한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 닥친 문제와 두려움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자유주의 강단 좌파에 비해 핵심적인 장점을 지닌다.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됨으로써 11월 선거는 노골적인 천박함과 번드레하고 기회주의적인 정략이라는 양대 기득권 체제 사이의 선택으로 좁혀지게 되었다. (이 둘은 많은 점에서 서로 포개지기도 한다. 트럼프 진영에도 기회주의적 설왕설래가 적지 않으며, 클린턴 쪽에도 거의 노골적인 천박함이 없지 않다.) 여기서 스탈린의 말을 비틀어 인용해 보고자 한다. 우파적 및 좌파적 “일탈”에 맞서 싸우던 1920년대 말에 한 기자가 어느 쪽 일탈이 더 나쁜가 하고 묻자 스탈린은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둘 다 더 나빠요!” 그러니, 트럼프와 클린턴 중에 누가 더 나쁘단 말인가? 둘 다 더 나쁘다.
2016년 3월 말 민주·공화 양당 내 강력한 분파들은 자신의 정당에서 지명되는 후보를 지지해야 할 의무감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고 시사한 바 있다. 공화당 지배층은 트럼프보다 클린턴이 낫다고 밝혔고, 샌더스 진영의 완강한 분파는 클린턴과 트럼프가 지명을 받는다면 자신들은 트럼프에게 투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클린턴이 공화당의 지지를 업고 선거를 치르고 트럼프는 좌익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받는 이 난국이야말로 사태의 진실이다.
번역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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