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1.19 18:33
수정 : 2017.08.21 10:41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후쿠야마의 꿈에 대한 최후의 일격,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 패배였고, 트럼프를 제대로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에서 정말로 구할 가치가 있는 것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유민주주의의 주류로부터 분파적 분리를 감행하는 것이다. 요컨대 클린턴에서 샌더스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슬라보이 지제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 교수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대한 반응 가운데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기 파괴적이기 때문에 거부해야 하는 것이 둘 있다. 첫째는 보통의 유권자들이 어리석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반(反)해서 투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트럼프의 피상적인 선동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선거가 있기 몇 달 전만 해도 미국과 캐나다의 거대 미디어들 1면 기사는 LGBTQ+, 그러니까 성적 소수자 이야기였다. 마치 우리 사회의 핵심 문제가 화장실 차별 극복, 아니면 ‘그’(he)나 ‘그녀’(she)가 아닌 다른 호칭(‘they’, ‘ze’ 등)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삼인칭 단수 대명사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듯.
우리는 억압된 것들의 잔인한 귀환을 목도했다. 모든 ‘정치적 올바름’의 규칙을 직접적이고도 조악한 방식으로 파괴하는 자의 선거 승리 말이다. 그런데 트럼프의 승리는 그의 조악함에도 불구하고 거둔 것이 아니라 (또한) 바로 그 때문에 거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가 팬티 속과 관련된 문제를 일으켰으며 공적인 자살과 다름없는 짓(죽은 전쟁 영웅의 부모를 조롱하고 엉덩이를 그러쥔 일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등등)을 저질렀다는 보도가 자유주의 언론에서 얼마나 많이 다루어졌는지 기억해 보라. 거만한 자유주의 정치평론가들은 트럼프의 조악한 인종주의 및 성차별주의적 언행과 사실 관계의 부정확성, 경제적 난센스 등에 대한 자신들의 끊임없는 공격이 그에게 해를 끼치기는커녕 어쩌면 오히려 그의 대중적 인기를 끌어올리는 구실을 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들은 정체성 또는 동일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놓친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이의 약점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다른 이의 강점과만―또는 주로 강점과― 동일시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트럼프의 한계를 조롱하면 할수록 보통 사람들은 그와 더 동일시하고 그에 대한 공격을 자신들의 약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트럼프의 조악함이 보통 사람들에게 던지는 잠재적 메시지는 “나는 당신들 중 하나요!”라는 것이었고, 평범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자유주의 진영 엘리트들의 오만한 태도에 끊임없이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최근 웹상에서는 리처드 로티의 <미국 만들기>(Achieving Our Country) 중 한 대목이 폭발적으로 퍼져 나갔는데, 그도 그럴 법한 것이 거의 20년 전에 로티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빼앗긴 자들의 투쟁 사이의 갈등뿐만 아니라 이 갈등이 포퓰리스트 반(反)정체성 정치 지도자의 출현을 낳을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예견했기 때문이다. 사회 정의에 관한 자유주의 좌파 기득권 세력의 온갖 언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곤경을 무시한다고, 가난하고 불쌍한 백인 유권자들이 생각할 때 “무언가 균열이 일어날 것이다. 하층민 유권자들은 이 체제가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표를 줄 강력한 지도자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우쭐대는 관료와 사기꾼 같은 법률가, 과도한 봉급을 받는 증권사 직원, 그리고 포스트모던주의 교수 들의 지배를 끝장낼 지도자 말이다. (…) 교육을 받지 못한 미국인들이 대졸자들로부터 강요받았다는 느낌에서 비롯된 온갖 원한의 감정이 출구를 찾을 것이다.”
샌더스가 정체성 정치를 거부한다고 자유주의자들은 비난하지만, 사실 샌더스는 계급과 인종과 젠더의 연결을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정체성 정치를 추구했던 것이다. 정체성 자체를 이유로 누군가에게 투표하는 것을 그가 거부할 때 우리는 그를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 “내가 여성이니 나에게 투표해라 하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월스트리트와 보험사들, 제약사들, 화석연료산업에 맞설 배짱 있는 여성이 필요하다. (…) 어떤 대기업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이오(CEO)가 취임하는 것은 분명 일보 전진이다. 그러나 만일 그치가 이 나라에서 일자리를 해외로 빼돌리고 자기 회사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면, 그가 흑인이냐 백인이냐 라틴계냐는 제기랄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샌더스는 이런 말로 성적 소수자 공동체 내(에도 있는) 인종주의라는 뜨끔한 문제를 건드린다.
“‘나 자신이 억압받는 소수자의 일원인데 어떻게 내가 편협한 사람일 수 있단 말인가?’라는 것이 어떤 백인 성소수자들 사이의 지배적 태도이다. 그러나 성적 소수자 세계가 백인 동성애자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을 배척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무지개 깃발은 겉으로 보기보다 더 하얀 것이다.”
모두의 연대와 연합이라는 공허한 외침은 여기서 충분하지 않다. 정체성 정치의 한계에 맞서는 것, 그것에서 특권적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투쟁들에 비해 경제적 투쟁의 우선성을 공개적으로 주창해야 한다. 비록 ‘계급 본질주의’라는 즉각적인 비난을 듣더라도 말이다.
이제 트럼프의 승리에 대한 두 번째 잘못된 반응을 살펴보자. 즉각적인 반격을 촉구하는 주장(‘철학할 시간은 없다, 행동해야 한다…’) 말이다. 이런 주장은 기묘하게도 트럼프 자신의 반지성주의적 견해를 되비추는 것처럼 보인다. 주디스 버틀러가 신랄하게 꼬집은바, 다른 모든 포퓰리스트 이데올로그와 마찬가지로 트럼프 역시 사람들에게 “생각하지 않을 핑계, 생각하지 않아도 될 핑계를 주었다.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복잡한 전지구적 세계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인데, 트럼프는 모든 것을 너무너무 단순하게 만든다.”
현 상황의 긴급성을 어떤 식으로든 핑계 삼아서는 안 된다―긴급할 때야말로 생각할 시간이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11번을 뒤집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세계를 너무 빨리 바꾸고자 노력했다. 이제 세계를 자기비판적으로, 우리 자신의 (좌파적) 책임을 점검하면서, 재해석할 때가 왔다.
위대한 보수주의자 T. S. 엘리엇은 <문화의 정의를 향한 소고>에서 말하기를, 때로는 이단과 비(非)신앙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종교를 살아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 주류에서 벗어나는 분파적 분리를 감행해야 하는 것일 때가 있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후쿠야마의 꿈에 대한 최후의 일격,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 패배였고, 트럼프를 제대로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에서 정말로 구할 가치가 있는 것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유민주주의의 주류로부터 분파적 분리를 감행하는 것이다. 요컨대 클린턴에서 샌더스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다음 선거들은 트럼프와 샌더스 사이의 것이 되어야 한다.
이렇듯 새로운 좌파의 기획을 위한 요소들은 상대적으로 상상하기 쉽다. 트럼프는 클린턴이 지지한 대규모 자유무역협정들을 철회하겠노라 공언한다. 그렇다면 클린턴과 트럼프 양자에 대한 좌파의 대안은 새롭고 다른 국제적 협정을 꾸리는 것이다. 은행들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협정, 생태적 표준에 관한 협정, 노동자 권리와 건강관리, 성적 소수자와 소수민족 보호 등등에 관한 협정 말이다. 지구적 자본주의가 준 커다란 교훈은 민족국가만으로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 인터내셔널이 아마도 지구적 자본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늙은 반공산주의 좌파가 내게 말하기를, 스탈린과 관련해 유일하게 좋은 점은 그가 서방 강국들을 정말로 겁먹게 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와 관련해 좋은 점은 그가 자유주의자들을 정말로 겁먹게 했다는 사실이다. 서방 강국들은 스탈린의 교훈을 배워서 자기비판적으로 자신들의 단점에도 집중했으며 그 결과 복지국가를 만들어 냈다. 우리 좌파 자유주의자들도 무언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번역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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