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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5.11 18:29 수정 : 2017.08.21 10:40

슬라보이 지제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 교수

4년마다 돌아올, 우리를 기다리는 비관적인 전망은 이렇다. 우리는 매번 같은 ‘신나치 위기’에 겁을 먹고 공포에 빠지며, 아무런 긍정적 전망이 없는 무의미한 선거에서 ‘문명화된’ 후보에 투표하라는 협박에 시달릴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자들이 공황 상태에 빠진 이유다.

<가디언>에 실린 해들리 프리먼의 프랑스 대선에 관한 코멘트 제목은 모든 것을 말한다. “마린 르펜은 극우이고, 홀로코스트 수정주의자다. 에마뉘엘 마크롱은 그렇지 않다. 선택하기 어렵나?” 프리먼의 글은 어산지에 반대하고, 힐러리에 친화적인 자유주의 영국 좌파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예상대로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투자은행가(마크롱)가 홀로코스트 수정주의자(르펜)와 유사한가? 신자유주의가 네오파시즘과 같은가?” 그리고 결선투표에서 마크롱에게 투표하는 좌파 조건부 지지자들, “마크롱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지만 그에게 투표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가진 이들을 조롱하듯 묵살한다. ‘누구나 마크롱을 무조적 지지해야 한다. 마크롱이 자유주의 중도파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르펜에 맞선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이것은 최악의 자유주의 협박이다. 또한 ‘힐러리 대 트럼프’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그들은 ‘파시스트의 위협에 맞서 우리는 힐러리의 깃발 아래로 모여야 한다’고 강요했다. 힐러리가 샌더스를 어떻게 난폭하고 노련하게 제압한 다음 그 선거를 트럼프에게 갖다 바쳤는지를 잊은 채 말이다.

질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마크롱은 유럽적이니까. 그런데 그가 의인화하는 유럽은 어떤가? 르펜의 포퓰리즘을 성장시킨 바로 그 유럽, 신자유주의에 복무하는 비인간적인 유럽 아닌가? 지금 일어나는 일의 핵심은 그것이다. 그래, 르펜이 위협이라 치자. 그렇더라도 우리의 지지를 마크롱의 뒤편에 놓아버린다면, 우리는 이런 악순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원인을 지지함으로써 원인과 맞서 싸우는 딜레마 말이다. 미국에는 이런 초콜릿 완화제 홍보 문구가 있음을 명심하자. “변비가 있으십니까? 이 초콜릿을 더 드십시오!” 풀어서 말하면, 변비를 치료하기 위해 변비를 일으킨 원인인 초콜릿을 더 먹으라는 것이다. 마크롱은 초콜릿 변비제와 같다. 병을 일으킨 그것을 먹어서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독립적 중도파 대 극우파 인종주의자’, 언론들은 프랑스 결선투표 후보들이 두 개의 반대되는 비전을 가졌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 후보들이 진정한 선택을 제공하는가? 르펜은 그녀 아버지가 만든 난폭한 반이민 포퓰리스트 이미지를 여성화·연성화했다. 마크롱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신자유주의를 상징한다. 여기에 살짝 여성화된 이미지(미디어에 재현되는 그 부인의 어머니 같은 역을 보라)를 덧붙인다.

그래서 부성은 퇴출되고, 여성성이 들어온다. 그러나 다시, 어떤 종류의 여성성인가? 알랭 바디우가 지적한 대로, 오늘날의 이상적인 세계에서 남성은 유희적인 청소년, 불법을 저지르는 자인 반면에 여성은 강하고 성숙하고 준법적이고 심지어 징벌적인 존재다. 오늘날 지배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종속된 존재로 호명하지 않는다. 판사, 행정관, 경영자, 교사, 경찰 그리고 군인으로 묘사하고 호명한다. 사회복지기관에서 전형적으로 연상되는 풍경은 여성 교사, 판사, 심리학자가 비성숙하고 비사회적인 남성 비행청소년을 돌보는 것이다. 그래서 새 여성성은 이렇게 암시된다. 냉정하고 경쟁적인 권력의 수행자, 유혹적이면서 교묘하게 조정하는 자, 그리하여 바디우의 말처럼 “자본주의 조건 아래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역설이 증명된다. 물론 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여성을 자본주의 수행자, 대리인으로 만든다. 단지 지금 자본주의가 냉정한 행정력을 지지하는 여성 이미지를 발명했다는 신호다. 조금 더 인간의 얼굴을 한 척하기 위해서 말이다.

마크롱과 르펜은 자신들이 반체제를 대표한다고 한다. 르펜은 명확하게 포퓰리스트적 방식으로 그것을 드러낸다면, 마크롱은 더 흥미롭다. 그는 현존하는 정당의 외부자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기성 정치 체제에 무관심한 이들조차 체제의 일부가 된 현실을 드러낼 뿐이다. 르펜의 정치가 우리에 반하는 그들, 그들에 대한 적의에 바탕한다면 -여기서 그들은 이민자부터 비애국적 금융엘리트까지 포함된다- 마크롱은 톨레랑스를 아우르는 정치적 무관심을 상징한다. 우리는 자주 르펜의 정치가 이민자 등에 대한 공포에 기반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과연 마크롱은 다를까? 그는 르펜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해 선거를 치렀다. 결선투표에 오른 둘은 모두 두려움에 기반한 후보들이었다.

이번 선거의 진정한 의미는 큰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서유럽과 동유럽에서, 정치적 공간의 오랜 재배치가 있었다. 최근까지 정치는 양분돼 있었다. 기독민주당, 자유보수당, 인민당 같은 ‘중도의 우파’와 사회당, 사회민주당 같은 ‘중도의 좌파’로 말이다. 그 변방엔 얇은 유권자층을 가진 환경주의자, 신나치당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서서히 지구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정당이 떠오르고 있다. 이 당들은 대개 낙태, 성소수자 인권, 종교적·인종적 소수자들에 대해 상대적 관용을 보인다. 반면 이런 당들에 반하는, 반이민 포퓰리스트 정당들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 때로 포퓰리스트 정당의 주변부에는 인종주의 신나치까지 포함된다.

모범적인 사례는 폴란드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이후, 폴란드의 주류 정당은 ‘반이데올로기’에 공통의 기반을 가진 중도 자유주의 정당과 보수 기독당이었다. 오늘날 폴란드에서 이들은 ‘급진적 중도파’의 지분을 놓고 다툰다. 보수와 자유주의, 양당은 누가 더 탈이데올로기적이고 비정치적인가를 놓고 경쟁한다. 서로를 여전히 ‘과거의 이데올로기 유령에 사로잡힌 존재’로 폄하하면서 말이다. 1990년대 초만 해도 보수주의는 지금보다 훨씬 나았다. 나중에 점점 유럽에서 자유주의 좌파가 득세하는 것처럼 보였고, 마크롱은 그 탈이데올로기적이고 반정치적인 ‘순수 급진 중도’의 최신 버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치적 삶에서 최저점에 이르렀다. 오직 하나 남은 것도 가짜 선택뿐이다. 그렇다, 르펜이 승리한다면 위험하다. 그러나 내가 그만큼 두려워하는 것은 마크롱의 영광스런 승리 후에 나올 이런 안도들이다. ‘코앞까지 닥쳐온 위기에서 벗어나 유럽과 민주주의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로 돌아가 다시 잠들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4년마다 돌아올, 우리를 기다리는 비관적인 전망은 이렇다. 우리는 매번 같은 ‘신나치 위기’에 겁을 먹고 공포에 빠지며, 아무런 긍정적 전망이 없는 무의미한 선거에서 ‘문명화된’ 후보에 투표하라는 협박에 시달릴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자들이 공황 상태에 빠진 이유다. 자유주의자들은 마크롱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이 마크롱이 위기에 빠진 시스템에 어떻게 공모했는지를 말해야 할 때다. 그러니 선거 기간에 나온 “충분히 말했다. 행동(투표)하자”라는 말은 거짓이다. 정확하게 반대의 것을 해야 한다. 무언가를 하라는 압력은 충분히 받았다. 이제부터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하자. 다시 말하면, 생각하기 시작하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다. 우리에게 제공된 정치적 공간이 얼마나 잘못됐는지만 맨날 되뇌는 급진 좌파의 뒤편을 떠나자. 기존 좌파의 재구성만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면, 도대체 왜 이런 좌파는 나타나지 않는가? 이미 나온 좌파의 전망 중에 시민들을 동원하고 조직할 만큼 강력한 것이 있는가? 우리가 르펜과 마크롱의 잔인한 굴레에 갇힌 것은 독자적 좌파의 대안 부재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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