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31 18:31
수정 : 2017.09.01 13:44
슬라보이 지제크
북한과 미국의 군사적 충돌은 이중의 위험을 안고 있다. 북-미 양쪽이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수사가 수사로 끝나지 않고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도 있다. 많은 평론가들이 말한 것처럼 트럼프는 김정은의 반대 입장을 취해 게임의 지분을 높였다. 이 적대적 상승은 점점 헤겔이 말한 인정투쟁을 닮아간다. 목숨 걸고 싸울 준비가 된 자가 결국 승자가 되는 싸움 말이다. 트럼프는 한심하게도 슈퍼파워가 되지 못하는 게임에 갇혀 버렸다. 작고 약한 국가인 북한의 입장으로선 이해가 되지만, 미국이라면 확고한 경고만으로 충분했을 게임인데 말이다.
우리는 오늘의 상황을 쿠바 미사일 위기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미국 국무부 분석가 레이먼드 가토프는 미국 군사주의를 잘 보여주는 말을 남겼다. “이 위기에서 배울 점은 우리가 조금만 약하게 보여도 소련은 도발하고, 오직 강력한 입장만이 소련의 성급한 결정을 머뭇거리게 한다.” 그러나 소련의 관점은 달랐다. 그들은 군사적 위협 때문에 위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우리가 벼랑 끝에 있고, 이 위기가 인간성을 파괴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끝났다고 소련의 지도자들은 믿었다. 그들은 눈앞의 안전만을 염려하지 않았고, 쿠바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만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백만명의 목숨, 나아가 문명 자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이 바로 위기의 정점에서 경험한 공포의 핵심이었다.
흐루쇼프와 피델 카스트로가 주고받은 편지에 언급된 공포도 바로 그것이었다. 카스트로는 1962년 10월26일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제국주의자들이 쿠바를 침공한다면, 그들의 공격적 정책의 위험이 인간성에 가하는 위험은 너무 크오. 따라서 소련은 제국주의자들이 핵무기로 선제공격할 상황을 용납해서는 안 되오. 제국주의자들이 국제법과 도덕률에 반해 쿠바를 정말로 침공한다면 가혹하고 위험한 결과를 남길 것이오. 무력을 통한 해결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소.”
흐루쇼프가 10월30일 답장을 보냈다. “당신은 우리가 적의 영토를 향해 핵무기를 발사하기를 제안했소. 물론 당신은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알고 있소. 그것은 단순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세계전쟁의 시작일지 모르오. 친애하는 카스트로 동지, 그 이유를 충분히 알지만 나는 당신의 제안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핵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가장 위험한 시대를 살아왔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미국도 큰 피해를 입겠지만 세계 사회주의 기지인 소련도 크나큰 고통을 당할 것이오. 쿠바에 관해서라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말하기 어려울 정도요. 쿠바는 화염 속에서 불타오를 것이오. 의심의 여지 없이 쿠바 민중들은 용감하게 싸우고 영웅적으로 전사할 것이오. 그러나 우리는 죽기 위해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것이 아니오. 우리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해, 더 적게 잃고 더 많이 승리하면서 공산주의의 달성과 승리를 쟁취하려는 것이오.”
오늘날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에 대한 무자비한 집착이 이런 국가주의 체제의 극단적인 예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는 지구촌에 살고 있는 한, 문명들을 문명화하고 공동체들 사이의 지구적 연대와 협력을 강화할 임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 후보였던 닐 키넉이 반전 연설에서 흐루쇼프의 핵심을 가장 잘 소환했다. “나는 내 나라를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내 나라가 나를 위해 죽도록 할 준비는 돼 있지 않다.” 소련의 ‘전체주의적’ 성격에도 핵전쟁의 공포가 미국보다 소련의 지도자들에게 더욱 강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의 주역으로 케네디가 아니라 흐루쇼프가 강조돼야 한다. 그러나 점점 부상하는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이러한 생각의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왜 그럴까? 새 질서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상상한 지구적 자유민주주의가 아니어서다. 그것은 서로 다른 정치신학적 생활방식의 깨어지기 쉬운 공존이고, 심지어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원활한 작동에도 반한다. 이것은 반식민주의 투쟁의 진보성을 통해 외설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보편적 기준으로 자유주의 서구는 사라졌다. 모든 삶의 방식이 동등하게 간주된다. 짐바브웨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가 트럼프의 슬로건 ‘미국 우선(주의)’에 공감한 것도 놀랍지 않다. 이런 식이란 것이다. ‘당신에겐 미국 우선, 나에겐 짐바브웨 우선’, ‘그들에겐 인도 우선 혹은 북조선 우선’. 이것은 첫 자본주의 제국이었던 영국의 방식이었다. 모든 인류학적·종교적 공동체는 자신들의 방식을 고수할 수 있도록 허락됐다. 인도의 힌두교도들이 전통대로 ‘안전하게’ 미망인을 불태워 죽이는 것 등이 허용됐다. 이런 지역적 관습들은 야만적인 것으로 비판받거나 전근대적인 지혜로 칭송됐지만, 그들이 제국의 경제적 일부인 이상 용납되었다.
냉전의 숨은 기본 원리는 매드(MAD·미친)로 불리는 ‘상호 확증 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였다면, 테러와의 전쟁의 기본 원리는 너츠(NUTS·어리석은)라는 ‘핵 사용 목표 선정’(Nuclear Utilization Target Selection)이다. 매드와 너츠는 상반돼 보인다. 미국은 차별화된 이원적 전략을 구사한다. 러시아, 중국과는 매드 논리를 지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 이란에 대해서는 너츠를 실행하려 한다. 매드의 역설적인 작동방식은 ‘자기 실현적인 예언’을 ‘자기 억제의 의지’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한쪽이 공격하면 상대는 최대한 파괴적 무력을 동원해 반격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어느 쪽도 전쟁을 시작하지 못해 ‘안전’이 보장된다. 너츠의 논리는 반대다. 반격의 위험 없이 적을 공격할 수 있으려면 적의 무장해제가 필요하다. 공격하기 위한 무장해제가 중심인 것이다.
적의 위협에서 오히려 이득을 얻는 도착적 전략이 북한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그들의 체제는 지독한 자본주의와 무자비한 일당독재를 결합한 것이다. 유지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음식과 같은 생필품을 인민에게 제공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야만적인 자본주의를 허용한다. 이미 북한에는 수백개의 ‘자유’ 시장이 있다. 개인들은 집에서 기른 먹거리와 중국에서 밀수입한 물품 등을 판매한다. 그리하여 북한이라는 국가는 평범한 인민을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에서 해방된다. 새로운 무기와 지배층의 사치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들어본 적 없는 이런 잔인한 역설은, 북한의 현재다. 국가가 아니라 개인들이 자기 자신의 힘에 기대야 한다.
이런 경향은 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야생 문화 길들이기”라고 부른, 지금 필요한 변화에 반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지금껏 모든 문화는 구성원 내부에서는 평화로운 것처럼 보였지만, 각각의 문화권 사이에서는 잠재된 전쟁의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헤겔이 개념화한 대로, 국가윤리는 국가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된 영웅주의 행동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국가들 사이의 야만적 경쟁을 의미한다. 오늘날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에 대한 무자비한 집착이 이런 국가주의 체제의 극단적인 예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는 지구촌에 살고 있는 한, 문명들을 문명화하고 공동체들 사이의 지구적 연대와 협력을 강화할 임무를 가질 수밖에 없다.
1960년대 선구적 생태주의 운동의 구호는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였다. 북한의 정치적 입장을 메아리처럼 반복하는 트럼프는 정확히 반대의 것을 약속한다.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
슬라보이 지제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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