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10.26 18:21 수정 : 2017.10.26 21:08

푸틴은 소련의 붕괴가 지난 세기에 일어난 가장 거대한 재난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랬던 푸틴이 이번에는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지지하고 있다. 거꾸로 유럽 좌파는 유고슬라비아 해체를 원하던 독일과 바티칸의 음흉한 음모에 대한 반발로 유고슬라비아 해체를 반대했지만, 지금은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지지한다.

슬라보이 지제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정치적 기회주의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징후는 정치적 상관관계일 것이다. 나와 상대방이 모두 손안에 공을 하나씩 쥐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공은 흰색 아니면 검은색뿐이며, 손안에 든 공이 어떤 색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손바닥을 펴서 색깔을 확인해서도 안 된다.

그러면 흰색-흰색, 검은색-검은색, 검은색-흰색, 흰색-검은색과 같이 네 가지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이번에는 내가 쥐고 있는 공의 색깔과 상대가 쥐고 있는 공의 색깔이 항상 반대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때는 검은색-흰색 아니면 흰색-검은색 두 가지 경우만이 나올 수 있다. 만약 상대방의 공 색깔을 알 수 있다면, 나는 손바닥을 펴 보지 않고도 내가 쥐고 있는 공이 어떤 색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두 개의 공이 상관관계에 있다고 부른다.(입자물리학에서도 양자 얽힘이라는 상관관계가 발견된다. 측정하기 전까지는 두 입자의 상태를 알 수 없지만, 측정하는 순간 한 입자의 스핀 방향이 결정되고, 이는 즉시 다른 입자의 스핀 방향을 결정한다.)

정치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일어나곤 한다.(특히 좌파 정치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다.) 특정한 정치적 국면에서 어떠한 입장에 서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러다 적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지 알게 된다. 그러면 자동으로 그와 반대되는 입장을 택하는 것이다. 레닌도 이와 같은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역설적이게도 레닌이 비판한 대상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문화적 냉전 시기를 예로 들어보자. 1940년대 후반 서구 문화는 보편적 세계시민주의를 표방했다. 그러자 소비에트연방에서 프랑스에 이르는 친소련 공산주의자 세력은 이를 공격하기 위해 반대로 애국주의와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내세우며 제국주의 비판에 나섰다.

카탈루냐 독립에 반대하는 한 스페인 여성이 11월9일 ‘이혼, 나쁜 사업’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카탈루냐 분리독립 주민투표에 대한 반응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푸틴은 소련의 붕괴가 지난 세기에 일어난 가장 거대한 재난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랬던 푸틴이 이번에는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지지하고 있다. 거꾸로 유럽 좌파는 유고슬라비아 해체를 원하던 독일과 바티칸의 음흉한 음모에 대한 반발로 유고슬라비아 해체를 반대했지만, 지금은 (스코틀랜드의 분리독립을 지지했던 것처럼)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지지한다. 서구 중도 자유주의 세력 역시 다르지 않다. 그들은 러시아의 지정학적 권력을 약화시킬 수만 있다면 어떤 분리독립 운동이라도 지지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카탈루냐의 분리독립이 스페인의 통합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위선적이게도 주민투표를 저지한 스페인 경찰폭력을 비판하면서 말이다.

나의 나라 슬로베니아에서 이런 혼란은 절정에 달한다.(편집자주: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다.) 대부분의 구좌파는 개방된 새로운 유고슬라비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고슬라비아 해체에 반대했지만, 카탈루냐의 분리독립에는 지지를 표한다. 반면, 슬로베니아의 국가주의 우파는 슬로베니아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지금은 조심스럽게 스페인의 통합을 지지하고 나섰다. 스페인 총리 마리아노 라호이가 그들의 보수주의 동맹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지배체제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누군가의 주권을 지지하는지 또는 반대하는지의 문제는 순전히 그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달려 있다.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푸틴이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이유는 유럽 통합을 방해함으로써 러시아의 힘을 강화하려는 전략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강력하게 통합된 유럽을 위해서는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반대하고 스페인의 통합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주장을 뒤집을 필요가 있다. 앞의 주장과는 반대로 스페인 통합에 대한 지지는 통합된 유럽에 대항하여 국민국가의 힘을 행사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의 일환이다. 이렇게 되면 (카탈루냐, 스코틀랜드 등의) 지역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더 강한 유럽연합을 의미하게 된다. 국민국가는 지역 자치권과 통합된 유럽을 중재하는 제한된 역할에 만족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될 때만, 유럽은 비로소 국가 간 갈등을 줄이고, 다른 거대한 지정학적 블록들과 발맞춰 보다 영향력 있는 국제적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다.

유럽이 카탈루냐 분리독립 주민투표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유럽이 저지른 계속된 실수 중 가장 최근의 실수일 뿐이다. 유럽연합의 가장 큰 실수는 중동과 북아프리카로부터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에 대해 일관된 정책을 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유럽연합은 난민에 혼란스럽게 대처하면서, (경제적) 이민자와 난민 사이의 기본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못했다. 이민자는 일자리를 위해 유럽에 정착하여 유럽 선진국의 노동 수요를 충족시키는 이들이다. 반면, 난민은 일자리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을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찾아 유럽에 온다.

난민이 자신이 도착한 나라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프랑스 칼레의 난민이 대표적인 예다. 그들은 프랑스에 정착하기보다는 다시 영국으로 밀입국하기를 원했다. 난민 수용을 가장 주저하는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헝가리-체코-발트해 연안국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악의 축') 국가들 역시 난민들이 선호하는 곳과는 거리가 멀다. 이 혼란이 만들어낸 가장 어처구니없는 효과는 그나마 난민에 적절하게 대처한 유일한 국가 독일이 유럽을 방어하려는 우파와, 난민에게 좀 더 제대로 된 처우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좌파 모두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카탈루냐 위기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유럽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연합은 개별 회원국이 분리독립이나 난민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정책을 취하도록 독려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럽연합의 공동결정에 따르지 않는 회원국에 효과적인 제재를 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중요한 문제일까? 유럽연합은 최소한의 연합 관계를 유지하면서, 개별 회원국을 지원하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틀과 안전망을 제공해야 하는 연합기구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유럽만이 단일국가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남을 수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유럽연합을 약화시키고, 유럽의 분열을 조장하기를 원한다. 유럽이 분열되면 힘의 공백 상태가 조성되고, 이 공백 상태를 메우는 것은 개별 유럽 국가들과 러시아 또는 미국 간의 새로운 동맹이 될 것이다. 유럽의 누가 이런 상황과 대면하고 싶겠는가.

번역 김박수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슬라보이 지제크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