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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17 18:07 수정 : 2019.01.18 18:55

급진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의 기대치와 요구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기름값을 내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환경을 위해 기름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도록 요구해야 한다. 교통운송 체계를 바꾸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한다.

슬라보이 지제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노란 조끼 운동은 마크롱 정부가 디젤 및 휘발유 유류세를 인상하자, 대중교통 사정이 나쁜 교외에 거주하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시위다. 노란 조끼 시위대는 수주에 걸쳐 프랑스의 유럽연합 탈퇴(프렉시트), 세금 인하, 연금 인상, 노동자의 구매력 향상 등 다양한 요구를 쏟아냈다.

노란 조끼 운동은 시위에 참여한 이들의 분노가 일관된 방향으로 폭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좌파 대중주의의 전형이다. 시위대는 세금을 낮춰야 한다고 요구하면서도 교육과 보건의료에 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기름값을 낮춰야 한다고 요구하면서도 환경 문제에 힘써야 한다고 요구한다. 유류세 인상 반대는 시위대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시위의 명목에 가깝지만, 시위를 촉발한 계기가 지구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한 조처였다는 사실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는 시위대가 프랑스의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를 원한다며 노란 조끼 운동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노란 조끼 운동은 정치 엘리트 계급을 상대로 하는 대규모 시민 시위라는 점에서는 프랑스 좌파 운동의 전통과 맥을 함께한다. 그러나 68혁명과 달리, 프랑스 중심으로부터 소외된 중소도시와 농촌의 저항이며, 그 좌파적 지향도 훨씬 흐릿하다. 극우파인 마린 르펜과 극좌파인 장뤼크 멜랑숑 중 어느 세력이 노란 조끼의 에너지를 전유할 것인지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노란 조끼 운동은 기존 정치세력과 거리를 두고 ‘순수한’ 시위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노란 조끼 시위대는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점이다. 시위대는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에 대한 비전이 없다. 현 체제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요구들을 쏟아낼 뿐이다. 시위의 이러한 특징은 노란 조끼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의 이해관계가 실은 현 체제에 기반해 있음을 보여준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노란 조끼 운동이 상대하고 있는 마크롱 정부가 그나마 나은 정치체제라는 점이다. 이번 시위는 마크롱에 대한 희망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마크롱은 한때 극우세력의 거품을 차단할 수 있는 희망, 진보적 유럽 정체성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희망으로 기대를 받았다. 위르겐 하버마스와 페터 슬로터다이크처럼 입장이 전혀 다른 철학자들조차 모두 마크롱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좌파들이 마크롱의 기획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경고했지만, 그때마다 그 지적들은 르펜에게 힘을 실어줄 뿐이라는 비판에 부딪혔다.

노란 조끼 운동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마크롱을 향했던 열광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안타깝게 되돌아본다. 지난해 12월10일 티브이로 중계된 마크롱의 대국민담화는 끔찍할 정도로 형편없는 시도였다. 절충과 사과로만 뒤섞인 이 담화는 누구 한명 설득하지 못한 채 마크롱에게 어떤 비전도 없다는 사실만 부각했다. 마크롱 정부는 그나마 나은 체제일지는 모르나, 여전히 그 정치는 계몽된 기술관료제의 자유민주주의적 좌표 안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란 조끼 운동을 조건부로만 긍정해야 한다. 좌파 대중주의는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가령 시위대가 승리하여 권력을 쟁취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들이 현 체제를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실행해 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경제적 파국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시위대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지금과는 다른 사회경제 체제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급진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의 기대치와 요구가 달라져야 한다. 기름값을 내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환경을 위해 기름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도록 요구해야 한다. 교통운송 체계를 바꾸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

‘난민 문제’와 같은 거대한 윤리적·정치적 문제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식민지 지배라는 범죄를 저질렀으니 영원히 그 빚을 갚아 나가야 해”와 같은 서구의 오랜 죄의식에 기대어 국경을 모든 이에게 개방한다고 난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 정도 수준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이민자와 노동계급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는 권력자들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고, 그들의 도덕적 우월성만 유지해주는 꼴이 된다. 국경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이민 자체를 반대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은 마오쩌둥이 말하는 ‘부차적 갈등’이다. 우리는 체제 그 자체, 난민을 발생시키는 현재의 정치경제 체제를 변화시켜야 하는데, 이 부차적 갈등은 그런 변화의 필요성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 거대한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온건해 보이지만 실은 현 체제의 기반을 약화시킬 방법을 찾아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다. 금융제도를 개선하여 신용과 투자가 작동하는 방식을 바꾸는 시도는 어떨까? 규제 조처를 새롭게 마련하여 난민들이 발생하는 제3세계인들에 대한 착취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68혁명의 구호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의 의미에는 좀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먼저, 현 체제에서 실현될 수 없는 것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의 ‘불가능한 것’이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태로, 노란 조끼 운동은 정치적 지도자인 ‘주인’들을 유혹하는 ‘히스테리적’ 도발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이 도발 다음에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 즉, 체제 내에서 실현가능하지 않은 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에 대한 ‘불가능’한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현 체제의 좌표 내에서는 불가능하게 여겨지거나, 애초에 사고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만이 우리가 직면한 생태적·사회적 곤궁을 풀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해법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히스테리적’인 것에서 ‘주인’으로 이행이 일어나야 하고 그래서 새 ‘주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지도자가 따로 없는 노란 조끼 운동의 자발적 특성을 높이 평가하지만, 노란 조끼 운동의 치명적 한계는 사실 바로 그 혼란스러움에 있다. 노란 조끼 운동에는 사람들의 요구를 번역해 사회에 대한 일관된 비전으로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헨리 포드는 처음 대량생산 방식으로 자동차를 만들면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라면 “마차를 끌 수 있는 더 빠르고 힘센 말”을 원한다는 답만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많은 사람은 원하는 것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잡스에게는 비판받을 점이 많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그가 진정한 ‘주인’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고객의 의견을 참고하지 않습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는 일은 고객의 임무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는 데 힘쓸 뿐입니다.” 잡스는 고객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는 일이 자신들 창의자본가의 임무라고 말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주인’의 방식이다. 잡스가 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비전에 충실했기 때문이지, 비전을 놓고 타협했기 때문이 아니다.

정치 지도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더 빠르고 힘센 말이다. 노란 조끼 운동의 경우에는 더 싼 기름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새로운 비전, 기름값 자체가 의미 없어지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다. 지금 우리에게 말 사료 값이 의미 없는 것처럼 말이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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