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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12 19:57 수정 : 2019.06.12 20:03

남해식당의 보리밥. 사진 백문영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남해식당의 보리밥. 사진 백문영

일년 중에 날씨 좋은 날이 며칠이나 될까? 날씨가 좋아도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날이 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시장을 찾는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묘한 안정감이 든다. ‘패션의 메카’라고 불리는 서울 동대문시장도 좋지만, 먹거리가 많은 남대문시장으로 향한다.

지하철 회현역에서 남대문시장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에는 늘 오가는 사람이 많다. 유명한 갈치조림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을 벗어나면 남대문 칼국수 골목이 나온다. 갈치의 매콤하고 알싸한 향의 유혹을 뿌리치고 간 골목이다. 천막 안에 칼국숫집들이 늘어서 있는 모양새가 당혹스러웠다.

천막으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였다. 나오는 길 역시 마찬가지인 구조였다. 안으로 들어가면 그야말로 별세계다. 수십 개의 칼국수 식당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 “식사하고 가라”며 옷섶을 붙잡는 상인들의 권유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디테일이 다르다”고 말하는 친구를 따라 향한 곳은 골목 가운데에 있는 ‘남해식당’이었다.

남대문 칼국수 골목의 시스템은 주머니 가벼운 이들에게는 놀랍도록 합리적이다. 보리밥이나 찰밥을 주문하면 반찬처럼 적은 양인 비빔국수와 칼국수, 된장국을 무한정으로 먹을 수 있다. 보리밥이나 찰밥 중 하나만 고르면 반찬 메뉴를 모두 먹을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이 한국의 남대문시장 말고 또 있을까?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겨우 몸을 비집고 들어가 보리밥을 주문했다. 주문하자마자 양푼 한가득 보리밥에 시금치, 콩나물, 호박 무침, 열무김치 등이 산더미처럼 얹어져 나왔다. ‘역시 시장 음식의 스테디셀러는 비빔밥이다’라고 속으로 감탄하면서 비빔밥을 먹고 있으니, 곧이어 비빔국수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가 등장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허겁지겁 밥을 먹고 국수를 비비다 보면 잡다한 생각은 사라진다. 음식을 ‘마시다시피’ 먹는 단순한 행위만 남는다.

생각해 보면 별일도 아닌 작은 일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 줄 때가 있다.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다. 너무 생각이 많아지면, 오히려 화가 되기도 한다. 이런 날에는 오히려 단순한 행위를 통해 위안을 받는다. 순수하게 먹는 일에만 집중하고 나면 잡다한 생각은 사라지고 기분 좋은 포만감만 남는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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