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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21 18:06 수정 : 2017.09.21 21:53


[김윤하의 어쩐지 신경 쓰여]

‘2030 여성 취향 음악’이란 말은 누구나 쉽게 입에 올리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다. 픽사베이
이상하고 신비한 대중음악 세상에는 몇 가지 마법의 단어가 있다. 아무도 그 정의와 용도를 알 수 없지만 만고불변의 진리로 알려진 ‘대중성’, 그 반대편에서 대항마로 활약중인 음악성과 끝없는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진정성’, 그리고 그 곁에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자리잡은 ‘2030 여성 취향’이 있다.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잔잔하게 흐르는 어쿠스틱 기타 연주 사이로 포근한 목소리가 달콤한 멜로디를 부르면, 흔히들 2030 여성 취향 음악이라고 한다. 준수한 외모의 남성 싱어송라이터가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건반을 누르며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도, 2030 여성 취향 음악이라고 한다. 어원과 상관없이 남발 중인 ‘걸 크러시’라는 미명 아래 조금이라도 강한 메시지와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여성 음악가들 음악에도 2030 여성 취향 음악이라는 꼬리표가 주저 없이 붙는다. 어떤 접점도 공통점도 없는 불특정 다수의 음악들이 특정 세대와 성별의 이름 아래 별다른 의심 없이 하나로 묶인다.

이 단어가 흥미로운 건, 누구나 쉽게 입에 올리지만 실은 아무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원하게 정의내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단 음악계만의 일은 아니다. 영화계도, 뮤지컬계도, 심지어 문학계도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2030 여성의 든든한 지지 없이는 실질적 사업 구상이 불가능하다 앓는 소리를 한다. 그런데 ‘진정한 대중성’ 혹은 ‘유의미한 성공’이라는 수식 앞에서는 일제히 태세를 전환한다. 사정권 밖에 있는 남성들과 4050 세대도 잡아야 한다는 전략을 편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당연하게 흘러가는 사고의 흐름 앞에 적게는 60%, 많게는 9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2030 여성 소비자의 존재는 그냥 ‘상수’다. 없어서는 안 되지만 거기 있어 당연한 것. 가끔 멀어진다 해도 손쉬운 미끼로 금방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가벼운 것.

2030 여성 취향 음악이라는 표현의 관용적 사용이 위험해지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다.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절대다수 소비자의 취향이 뻔한 것 그래서 가벼운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 산업 내부에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깊이 연구하고 고민할 명분은 사라진다. 2030 여성 취향 음악이라는 말을 숨 쉬듯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진지한 고찰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여자는 알 수 없는 생물이다’라는 정의에서 비롯된 여성성을 향한 후안무치를 닮았다. 알아야 마땅한 존재이며 그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알 수 없다는 말 한마디면 그 모든 예정된 고난과 역경은 일순간 사라진다. 자의와 상관없이 별안간 ‘알 수 없어진’ 대상에게 남은 선택의 길은 두 갈래뿐이다. 무의미한 신성화로 떠받들어지거나, 무시당하며 잊히거나.

지금도 우리 곁에 망령처럼 자리한 2030 여성 취향 음악이라는 말에 감도는 은은한 폄하와 멸시의 기운은, 어쩌면 그 단어가 그렇게 유통되도록 방관해온 우리 모두의 책임일 것이다. 산업 전반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하는 2030 여성 취향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무언가 ‘다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그 외의 세대와 성별의 취향을 분석해야 한다는 오랜 주장은 그래서 낡았다. 매해 힘겹게 생명 연장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뿌리를 보다 튼튼하게 가꾸기 위해서라도, 산업의 바탕을 이루는 ‘2030 여성 취향’이 무엇인지 기초적이고 심층적인 분석이 절실하다. 세대의 확장과 취향의 세분화 노력은 그다음 문제다.

김윤하/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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