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패밀리사이트

  • 한겨레21
  • 씨네21
  • 이코노미인사이트
회원가입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12.04 08:37 수정 : 2006.12.12 16:51

상대빈곤률과 절대빈곤률 추이

[한겨레 김기태 기자 달동네에서 한달]
① 양지마을 이웃들

기자가 세든 집은 양지마을 한가운데 ‘수도사 골목’에 자리잡고 있다. 골목길 끝에 ‘수도사’란 절이 있어 이렇게 불리는 이 거리엔 10가구가 뒤섞여 산다. 이사온 첫날, 이웃의 박아무개(72) 할아버지가 철문을 ‘끼이익’ 열며 “젊은 사람이 왔구먼!” 하고 말을 걸었다. 박씨는 평생 노동으로 단련된 단단한 몸집을 가졌다. 그는 중계동과 상계동의 빈민촌에서 40년을 보냈다.

몰락한 중산층 이사온 뒤
높은 집값·불안한 직업 탓 가난탈출 힘들어 눌러앉아
2002년 이후 빈곤층 급증

박씨를 빼곤 며칠이 지나도 동네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어느날 새벽, 골목길 들머리에 버티고 서 출근길 이웃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옆집 구아무개(39)씨는 몇 해 전 남편의 빵 도매사업이 넘어지는 바람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 오른쪽 옆집엔 공무원 전아무개(59)씨가 살고 있다. 그는 아침 5시45분에 집을 나서 번개처럼 당고개역까지 달려간다. 지난 몇 해 연년생 세 아들의 대학 등록금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골목길 첫집에 사는 박아무개(57) 아주머니는 식당을 꾸리다 사기를 당해 양지마을로 이사왔다.

‘수도사 골목길’ 열 집 중 여섯 집은 10년 이상 빈곤에 시달려 온 장기 빈곤층이다. 나머지 세 집은 사업 실패, 사기 피해, 교육비 부담 탓에 이 마을에 새로 들어온 ‘신빈곤층’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 빈곤문제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풍경이다. 박씨 할아버지와 같은 이들은 좀처럼 가난 탈출 기회를 찾지 못했다. 구씨 같은 몰락한 중산층이 재해·사고 등으로 빈곤층에 편입되면 높은 집값과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 때문에 예전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

구인회 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1990년대 경제 위기 직후인 1998~99년 사이 전국민의 6.2%가 빈곤층으로 유입됐으며, 전체 빈곤 인구 가운데 약 75%가 10년 이내에 빈곤층에 편입됐다”고 집계했다.

새로 유입되는 빈곤층이 늘어나면서 눈여겨 볼 점은 상대빈곤율의 증가다. 상대빈곤율은 개별가구의 소득이 중위소득(100가구 가운데 50번째의 소득)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 비율이다. 허선 순천향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상대빈곤율이 2002년 이후 눈에 띄게 증가해 2004년 최대치를 기록했다”며 “우리 사회의 양극화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학자들은 이제 경제적 결핍·소득 수준만을 놓고 빈곤문제를 바라보지 않는다.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요즘 빈곤층은 일하면서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빈곤’에 시달리고, 사회적·문화적·심리적·공간적 격리 속에서 가난의 절망을 내면화한다”며 “빈곤층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사회적 배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김기태 기자 kkt@hani.co.kr

양지마을은 서울 노원구 상계4동 15~17통 일대 언덕에 걸쳐 있다. 마을이 자리잡은 언덕은 조선시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 묘가 가까워 ‘덕릉고개’라고도 불린다.

공동묘지로 쓰이기도 했던 이곳에 1960년대 중반 남산과 종로 등지에서 재개발에 밀려온 철거민들이 정착했다. 마을 땅의 90% 정도는 산림청 소유고, 주택 가운데 열에 아홉은 무허가다.

주민 2383명 가운데 국민기초생활 수급자는 236가구 348명, 장애인은 546명이다. 어머니만 있는 가정은 26가구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김기태기자 달동네에서 한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