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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2.27 18:54 수정 : 2006.12.28 07:07

39일 동안의 양지마을 ‘수도사 골목’ 생활을 마친 김기태 기자가 지난 26일 이삿짐을 싸 골목을 나서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달동네 한달]가난 눈치에 감춰 부른 이름들 예쁜 그대로 싣게 될 날 올거야

은경아!

날씨가 퍽 추워졌다. 방학인데 즐거운 일이라도 생겼니? 양지마을은 겨울이 깊을수록 풍경도 더 을씨년스러운 것 같다. 높은 곳에서 마을을 내려다 봤더니, 눈이 온 지도 한참 되었는데 아직도 눈을 덮어쓰고 있는 지붕들이 꽤 있더라. 혹 난방을 못해 그런 건 아닌지 잠시 생각했어.

날은 추워졌지만 공부방 아이들은 여전히 시끄럽고, 말도 안 듣고, 그리고 예뻐. 공부방도 이번주는 방학인데, 어제 보니 갈 데 없는 아이들은 여전히 공부방에 와서 밥을 먹더구나. 은경이는 저녁에 학원을 다니느라 공부방에는 자주 못 들르지? 학원은 잘 다니고 있는지 모르겠다. 듣고 싶던 비싼 수학 특강은 듣게 되었는지, 아직도 차비가 모자라 학교까지 30분씩 걸어 다니는지 궁금하다.

지난 7일치 신문에 네 이야기를 쓸 때 네 이름을 가명으로 쓰고, 지금도 편지를 쓰며 너를 딴이름으로 부르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아닌데, 예쁜 이름을 감췄으니 말이지. 하지만 아직 세상은 가난을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그래서 가난한 아이의 얼굴과 이름이 신문에 실리는 것은 그 아이를 괴롭히는 게 되는 셈이지.

그렇지만 가난은 개개인이 짊어진 죄가 아니라, 나라와 사회 모두가 힘을 모아 함께 물리쳐야 할 공공의 적일 뿐이란다. 또 너와 공부방 아이들을 ‘익명의 어린이들’로 만든 책임은 우리 어른들에게 있는 것이란다. 그러니 가난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단다. 오히려 너희들의 가난을 방치하고 있는 어른들이 부끄러워해야겠지.

그래서 이제 양지마을을 떠나는 아저씨는 내멋대로 작은 소망을 품어봤어. 언젠가는 은경이를 포함해 공부방 아이들 모두의 예쁜 진짜 이름을, 해맑은 얼굴과 함께 우리 신문 가득히 실어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말이야. 나랑 너희들이랑 함께 실컷 눈싸움을 하는 장면이면 어떨까?

곧 공부방 선생님 통해 안부 물어볼께. 추운 겨울에 감기 조심해라.

기자 아저씨가

⑨ 양지마을을 떠나며

냉골방서 자개 붙이는 아주머니…

암수술비 걱정 큰 함필선 할머니…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26일 오전 짐을 쌌습니다. 지난달 18일 이곳 양지마을로 이사왔으니, 정확히 39일 만입니다. 집에서 요리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짐은 단출합니다. 이불 짐 세 꾸러미와 옷가지, 책들을 싸니 종이가방 다섯 개에 담깁니다. 올 때 종이가방 두 개를 들고 왔으니 그 사이 짐이 불어난 거죠.

쌓여 있는 쓰레기도 치웁니다. 쓰레기를 내놓으면서 우리 골목을 다시 보니, 재활용품과 버리는 휴지가 단정하게 정리되어 집집마다 문 앞에 놓여 있네요. 이곳 ‘수도사 골목’은 언뜻 보면 집들이 무질서하고 어지럽게 널려 있지만, 자세히 보면 좁은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그리고 미적으로 활용한 흔적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골목길 가운데 빈집에는 집 밖 벽에 거울이 달려 있습니다. 골목길에 사는 사람들 모두는 출근길에, 등굣길에 이 거울 앞에 잠깐씩 서서 매무새를 고치고 지나갑니다. 언젠가 이 집에 살았던 주인은 거울을 좁은 실내 공간에서 골목으로 빼내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서비스’도 베푼 셈이지요.

골목길 어르신들께도 인사를 합니다. 맞은편 집에 혼자 사는 임아무개(82) 할머니가 “아침밥이라도 한번 해주려고 했는데 … 섭섭하네” 하고 말씀하십니다. 한 집 건너 옆집의 박아무개(72) 할아버지도 한마디 하십니다. “이제 정 들려는데 가는구먼.” 기사 쓰랴, 취재하랴 골목길에서는 시간을 많이 못 보냈는데, 어르신들의 따뜻한 말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 마을 사회복지기관인 ‘나눔의 집’을 찾아갑니다. 이번 기사 연재를 준비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은 곳입니다. 대표인 권춘택 신부님에게도 인사드리고, 활동가인 송제형·최현기·강신저·변경희·성정아·김성은 선생님들에게도 인사를 드립니다. 방화분·한은정·여윤정 자원봉사자와도 인사를 나눕니다. 이분들은 지역의 노인과 청소년 등 힘없는 이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보호막입니다.

얼마 전 변경희 선생님과 나눔의 집에서 하는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러시더군요. “절대 무슨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니고요. 그냥 직업으로 하는 일이에요.” 그 말이 저에겐 묘한 공명을 낳았습니다. 아마도 이 말은, 흔히 사람들이 “아, 참 좋은 일 하십니다”라는 투로 말을 건넬 때 종종 쓰는 답이겠죠. 자신들의 일에 대한 그런 ‘윤리적인 단정’이 그다지 반갑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면 어떨까요. “아, 참 필요한 일을 하시는군요.”

나눔의 집을 나서는데, 독자 한 분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경북 영천에서 벼농사를 짓는 이종순(39)씨입니다. 신문에서 기사를 읽고 “씁쓸해서” 올해 농사지은 쌀 40㎏ 한 가마를 나눔의 집으로 보내주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양극화니 세계화니 해서 죽는 건 우리 농사짓는 사람들하고 노동하는 사람들뿐”이라며 “저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서 많이 보내지는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기사 연재를 하면서 행복할 수 있었던 건, 이씨 같은 마음 따뜻한 분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9일동안 양지마을에 살며 ‘달동네에서 한달’ 기사를 연재한 김기태 기자가 26일 짐을 싸 동네를 떠나며, 10평 방에서 자개 붙이는 일을 하며 두 딸과 생활하는 이웃 김아무개씨(12월14일치 1면 보도)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특히 중학생 은경이 이야기(12월7일치 1면)와 함필선 할머니 이야기(12월22일치 1면)가 실린 날 오전에는 제가 다른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전자우편으로, 휴대전화로 연락해 주셨습니다. 이분들의 따뜻한 마음은 분명 추운 겨울 이곳 양지마을에 훈훈한 바람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지만 <한겨레>에서는 기사 밑에 별도의 후원 계좌번호나 연락처를 적지 않았습니다. 또 도움을 주겠다고 연락해 오신 분들의 수나 기부금 액수를 집계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연재의 의도 자체가 어려운 이웃을 소개해 독자들의 따뜻한 성원을 이끌어내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어려운 이웃의 이야기를 통해 제도의 문제를 보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시정하는 데 힘을 모아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주겠다는 분들의 연락을 받으면, 한편으로는 행복하면서 한편으로는 애초 의도가 기사에 제대로 반영이 안 된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해 나눔의 집 활동가인 송제형 선생님의 말도 귀 기울일 만합니다. “각자 호주머니를 털어 직접 도움을 주는 것도 고맙지만,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내는 세금이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 기사 역시 우리 세금이 필요한 곳에 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차비가 없어 집에서 학교까지 30분을 걸어다니는 은경이나, 전기요금을 아끼느라 한겨울에도 어두운 방의 문을 열어놓은 채 추위에 떨면서 자개를 붙이는 김아무개 아주머니(12월14일치 1면), 암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비용 때문에 걱정인 함필선 할머니 같은 분들에게 말이지요.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국회는 이분들에게 갈 수 있는 혜택의 손길을 자꾸만 끊으려고 하네요. 내년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한부모 가정 어린이에게 주는 양육비를 매달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올리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내년부터 방문 간호사를 2천명 더 늘리기로 했지만, 전국 78만명 독거노인들에게 1만명의 방문 도우미를 보내려고 했던 것은 계획과 달리 7200명으로 줄었습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아니라서 정부의 생계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는 절대빈곤 인구 100만명에 대해선 여전히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내년 겨울 양지마을은 지금보다 더 추울지도 모릅니다. 떠나는 발길이 더욱 무겁습니다. 양지마을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꼭 건강하셔야 합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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