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9.09 11:34
수정 : 2017.10.27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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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긁음. 2017.4, 펜·색연필,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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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조건형의 일상드로잉
①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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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긁음. 2017.4, 펜·색연필,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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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직 노동자로 10여년 일하다가 2017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드로잉 수업을 병행하며 일상드로잉 작가로 살기로 결심했다.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일상드로잉을 하면서 사는 게 목표이며, 어떤 모습이든 자신의 삶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일상드로잉 인구가 점점 늘어나기를 바란다. 양산에서 소설 쓰는 아내와 일상의 작은 즐거움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의 노동하는 삶이 멈추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기의 땀과 노력들이
나를 또 다른 노동의 현장에
이끌어준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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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머리. 2017.5, 펜,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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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새로 온 탱크로리 기사님과 울산으로 외근을 갔다. 재생할 수 있는 기름인지 확인해 보고 폐유드럼을 수거해오는 일이었다. 가져와도 쓸 수 없는 드럼은 페인트 래커로 ‘×’ 표시를 하고 나머지 드럼들은 카고 트럭에 실어달라고 지게차를 모는 직원에게 부탁을 드렸다. 새로 온 기사님이 바를 칠 줄 몰라서(드럼이 흔들리지 않도록 두꺼운 줄을 트럭 양옆으로 단단히 묶는 걸 ‘바를 친다’고 한다) 내가 바를 쳤다. 한쪽을 묶고 난 뒤 반대쪽으로 바를 넘기고 바퀴를 밟고 넘어가려는 찰나, 갑자기 ‘쿵’ 하고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냥 머리가 부딪혔다고 생각했는데, 바닥으로 피가 뚝뚝 흘렀다. 카고 트럭 바로 옆에 콘테이너 트럭이 있다 보니 카고의 윙(문짝)을 위로 높이 올릴 수가 없어서 살짝만 양옆으로 올려둔 게 화근이었다. 그걸 보지 못하고 그 윙 날카로운 면에 머리가 찍혔던 것이다. 피가 계속 뚝뚝 떨어져, 다친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현장 사람들에게 응급실에 태워다 달라고 부탁드렸다. 울산 응급실에 도착해선 철심으로 여덟 바늘을 꿰매고 시티(CT) 촬영을 했다. 시티에 하얀 게 보였는데, 의사는 석회질이거나 종양일 수 있다며 큰 병원에서 엠아르아이(MRI·자기공명영상)를 찍어 보라고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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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아르아이(MRI) 판독 중. 2017.8, 펜·색연필,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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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회사로 돌아와 그다지 크지 않은 종합병원에서 엠아르아이를 찍었다. 의사는 대번에 종양이라면서 양산 부산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했고, 바로 다음 주 월요일로 진료 예약을 잡았다. 일단은 아내와 어머니에게 설명을 드려야 했기에 어머니 집으로 가 종양 이야기를 꺼냈다. 다친 ‘덕분’에 머리에 종양이 있는 걸 알게 되었으니, ‘잘 다친 셈’ 아니냐며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는 엄마보다 훨씬 더 놀랐다. 아내와 손잡고 산책도 두 번이나 하면서 별 이상 없을 것이라고 거듭 안심시켰다. 나도 내 병에 대해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종양 관련 책을 인터넷으로 두 권이나 주문했다.
월요일이 되어 아내와 함께 대학병원 뇌종양 센터로 찾아갔다. 대부분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라 이제 마흔 한 살인 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많이 낯설게 느껴졌다. 담당 의사는 한참 동안 시티 촬영분과 엠아르아이 촬영분을 비교하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몇 분 되지 않는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뇌수막종의 하나인데, 다행히 뇌수막종 주변을 딱딱한 것이 둘러싸고 있어서 일단은 종양이 자랄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했다. 6개월 뒤에 종양이 자랐는지 다시 검사를 해보고 자라지 않았다면 또 1년 뒤에 촬영을 하면 된다고 했다. 평소에 신경써야 할 게 없냐고 물어보니 의사는 특별히 신경 쓸 건 없다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짝지(나는 아내를 ‘짝지’라 부른다)는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당장 수술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라는 말을 듣고는 그제야 안심이 되어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고 했다. 나는 담담했는데, 오히려 짝지가 걱정이 많아서 마음이 많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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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2017.4, 펜,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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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난 상처가 아물려면 일주일 정도는 걸릴 것 같아 회사에 일주일 정도만 쉬겠다고 통보했는데, 사람이 없으니 간단한 일만이라도 하게끔 출근하라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섭섭함을 넘어 너무 화가 났다. 평소 내가 작업에서 꽤 큰 몫을 하는 편이라 내가 자리를 비우면 많이 힘들어지긴 한다. 마침 내가 다치던 그날, 회사에 들어온 지 한 달 정도 된 동료가 느닷없이 퇴사를 한 것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이곳 정유회사에 꼬박 6년8개월을 다녔더랬다. 일이 고된 편인데다가 야외에서 일을 해야 하는 탓에 매년 여름이면 너무나 힘들었다. 게다가 사람까지 한 명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다시 회사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인간다운 대우는 고사하고 복지나 임금체계조차 충분치 못한 회사라서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까 고심하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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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2014.9, 붓펜, 1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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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이것이 인생의 전환기는 아닐까? 6년8개월 동안 성실히 다니던 직장을 나는 그렇게 떠났다. 헬스장에 같이 다니던 탱크로리 기사 형님들이 있어서 종종 회사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회사에선 내게 몇 번이나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는지 물어오곤 했다. “건형이, 너랑 일할 때가 참 편했는데, 너 나가고 나니 일이 더 힘들어졌다.” 간혹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그만큼 성실히 일을 하던 사람이구나, 동료들로부터 신뢰를 받았구나 싶은 생각에 잠시 흐뭇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지난해부터 저녁 시간을 쪼개어 일상드로잉 수업을 하나 진행해 왔다. 다치기 전까지 모두 5기까지 펜드로잉 수업이 열렸다. 이걸 생계로 삼아볼까? 잠시 이런 생각도 해봤지만, 드로잉 강사 일로 생계가 유지될 수 있을지 여전히 자신은 없다. 하지만 1년 정도 유예기간을 두고 실험을 해보리라. 만일 그 일로는 생계가 되지 않으면 다시 다른 생산직 일자리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일을 그만두자마자 적극적으로 수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덕분인지, 생각보다 빨리 여러 강좌가 꾸려졌고, 지금은 일주일에 다섯 개에서 일곱 개 정도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생산직 노동을 그만두게 되었으나, 나는 나의 노동하는 삶이 멈추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기의 땀과 노력들이 새로운 이미지와 풍경으로 나를 또 다른 노동의 현장에 이끌어준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렇게 예술 노동자가 되었다.
박조건형 일상 드로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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