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1.10 19:30
수정 : 2017.11.11 09:05
[토요판] 박조건형의 일상 드로잉⑤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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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 닦기. 2017.8, 펜·색연필,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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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덕분에 여러 책을 좀 읽다가, 살림의 의미를 새삼 곱씹어 본다. ‘살림’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말한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집에서 편히 쉬기 위해 청소와 빨래를 하고 집에서 나온 쓰레기를 분리 배출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모두 일컫는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한 사람의 몫으로만 규정되어 왔다. 가족 모두를 살리는 이 중대한 행위는 너무도 저평가돼 왔고, 여성에게만 그 책임이 한정됐다. 집안일은 누구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다. 남편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모두 다 같이,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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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기. 2017.8, 펜·색연필,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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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남편이 경제활동을 하기 때문에 아내가 가사를 전담하는 것이라면, 맞벌이의 경우는 남편과 아내의 가사노동에 차이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은 일하는 주부에게만 가사가 가중될 뿐 남편의 경우는 전업주부의 남편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돈을 버는 일만큼이나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밥을 해 먹고 집안일을 하는 가사노동 역시 중요하다. 몸으로 해야 하는 일뿐만 아니라 머리로 가늠하고 계획하는 일까지 따지면 웬만한 직장인 못지않다. 가지수도 많고 해도 해도 끝이 없으며, 티도 안 난다. 육아라도 더해지면 말 그대로 ‘전쟁’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삶이 노동이다. 어떤 노동은 ‘돈’으로 치환되지만 어떤 노동은 그렇지 못할 뿐이다. 그 몫을 우린 가정의 한 사람에게 전가해왔던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여성의 일이나, 남성의 일 같은 건 없다
서로를 살리는 일이 있을 뿐이다
남자다움이나 여성스러움을
가사노동에서 찾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살아가기 위해 함께 해야 하는 노동이 있을 뿐이다
내가 하기 싫은 집안일은 타인도 하기 싫다. 직장일이 힘들어 물리적으로 함께 하기 쉽지 않다면 상대방의 노동에 대한 감사라도 표하는 것이 ‘덕분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우리 집은 짝지나 나나 국 없이도 밥을 잘 먹고, 반찬 몇 가지 없어도 잘 챙겨 먹는다. 지금은 주로 아내가 음식을 하는 편이긴 하지만 간단한 요리들은 옆에서 구경하며 수다도 떨면서 음식 하는 법을 조금씩 눈으로 익힌다. 아내와 같이 음식을 만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아내가 요리를 할 동안 필요한 재료를 다듬고 조리한 도구는 옆에서 바로바로 씻어버리면 나중에 설거지할 그릇이 줄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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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국 만들기 시범. 2017.6, 펜·색연필,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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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장을 보러 가더라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카트 끌고 짐 나르며 같이 다녀오면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트 장보기는 다녀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 가지고 온 물품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일은 내가 몰랐던 또 다른 노동이다. 장을 봐 온 물품들까지 냉장고에 잘 정리해 넣어야 일이 끝난다고 생각을 바꾼 뒤로는, 이제 나도 달걀을 냉장고에 넣고 과일은 씻어서 싱크대에 말려두고 음료수와 맥주는 필요한 것만 냉장고에 넣고 나머지는 베란다에 잘 정리해둔다. 포장된 것은 포장을 벗겨 쓰레기를 다시 분류하고 물품은 냉장실에 차곡차곡 정리한다. 대파를 사면 꺼내 먹기 쉽도록 씻어서 용도별로 다르게 썰어 냉장고에 넣는다. 요리를 할 때도, 장을 보고 나서도, 함께 일을 하면 시간은 반으로 줄어들고 이해받고 이해해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오간다. 당연히 서로를 살리는 ‘동지애’는 좋아진다.
요리를 함께 하는 습관을 들이고 설거지도 자주 정리하다 보면 그릇은 어디에 들어가야 하는지 양념이나 기름 종류들이 어디에 있는지 금방 알게 된다. 어려운 게 아니다. 배우려는 마음이, 나의 일이라는 마음가짐이 없어 부엌일이 낯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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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장보기. 2016.9, 펜·수채화, 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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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돌리는 일도 해보면 어렵지 않다. 세제 넣고 섬유 유연제 넣고 옷에 손상이 있을 것 같은 종류는 아내에게 물어보거나 일단 빼두고 나머지 빨래는 세탁기에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된다. 빨래가 다 되고 빨랫줄에 함께 널면 노동은 반으로 줄고,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은 배가 된다. 수건을 함부로 쓰던 어떤 남편은 세탁 일을 전담해 보니 아이들 빨래까지 함께 돌리면 빨래양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고는 수건을 여러 번 쓰고 나서 빨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도 수건은 여러 번 말려 쓴다. 냄새가 약간 날 것 같으면 그제야 빨래통에 넣는다.
화장실 청소도 마찬가지. 샤워할 때마다 샤워하는 김에 바닥과 비눗물 튄 욕실 벽을 솔과 타월로 대충 닦아 주면, 묵은 때가 끼지 않는다. 남자들은 서서 소변을 보면서 변기에 많이 튀는데, 욕실에 불쾌한 냄새가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앉아서 소변을 보거나 휴지를 뜯어 소변 자국을 바로 닦으면 냄새는 거의 나지 않는다. 내 경우 예전에 엄마, 동생과 같이 살 때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동생과 엄마 덕에 샤워 후 바닥과 벽을 닦는 습관이 생겼고 소변을 앉아서 보거나 흔적을 닦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욕실 청소를 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런 매너라도 지켜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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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널기. 2017.6, 펜·색연필,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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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여성들은 내일 뭐 먹지, 그다음 끼니는 뭘 해야 하지,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된다. 여성들에게 제일 맛있는 밥이 남이 차려 주는 밥이라는 말이 그냥 나왔겠는가. 특히 여름이면 불 앞에서 조리를 해야 하는 일이 상당히 힘겹다. 그걸 고려해서 우리는 여름에는 외식도 적당히 하고 불로 조리하는 음식을 자주 먹지 않는 편이다. 내가 요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차려주는 밥 감사히 먹고 함부로 반찬 투정 하지 않으려고 한다.
여성의 일이나 남성의 일 같은 건 없다. 서로를 살리는 일이 있을 뿐이다. 남자다움이나 여성스러움을 가사노동에서 찾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살아가기 위해 함께 해야 하는 노동이 있을 뿐이다. 아이들에게도 스스로를 돌보고 일상의 생활을 지켜나가는 능력을 키워주고 또 본을 보이는 것이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다. ‘살림’은 모두에게 스스로를 살리는 큰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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