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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10 10:45 수정 : 2018.03.10 11:51

비 온 뒤 베를린. 2017.10. 펜, 색연필. 30×21㎝

[토요판] 박조건형의 일상드로잉
⑪ 유럽 여행 뒤의 우울

비 온 뒤 베를린. 2017.10. 펜, 색연필. 30×21㎝

일상드로잉 작업을 하다 보니, 여행을 떠나기 전에 유럽에 ‘드로잉’을 하러 간다고 주변에 많이 이야기했었다. 현지에 도착한 날부터 하루하루 열심히 그리기는 했다. 나는 인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인물을 중심으로 부분적인 상황 묘사들만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이국적이고 웅장한 멋진 풍경들을 사진으로 많이 담게 되었는데, 그걸 그리려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자신감은 사라져 갔고, 그림은 그려야 하는데 그리기는 싫고 도저히 그림을 즐길 수가 없었다. 이런 실력을 가지고 대체 어떻게 드로잉 수업으로 생계를 꾸리고 일상드로잉 작업들을 할 수 있겠나 자괴감에 빠져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분명 누군가는 삶에 대해 낙관보다는
비관을 가지고 있을 테고,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든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에게는 나의 삶과 리듬에 어울리는
방법이 있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다
드로잉과 글쓰기를 그만두진 않는다

경비를 아낀답시고 매일 장을 보고 저녁과 아침을 챙겨 먹는 과정도 여행이라기보다 일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멋지고 웅장하게만 보였던 성당과 오래된 건물들도 어디에서든 만나게 되니 심드렁하게 느껴졌다. 유럽은 한국과 달리 실내의 조명들이 상당히 어두웠는데, 그게 포근하게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더 갑갑하게 했다. 외곽 지역의 경우 유난히 어둡고 인적까지 드물어서, 밤에 산책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침침한 조명 아래 숙소 안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일은 정말 힘겨웠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조명은 너무 어두웠고, 결국 여행을 시작하고 15일 정도까지만 매일 그림을 그리다가 이후엔 그만두었다. 그려야 된다는 강박이 오히려 더 힘들어, 그냥 여행만 하기로 했다.

사랑초. 2017.10. 펜, 색연필. 21×15㎝
한국이라면 기분전환을 할 방법들을 생각해 어떻게든 움직였을 텐데, 유럽의 작은 숙소 안에선 저녁에 할 게 별로 없었다. 무기력한 상태는 좀체 벗어나지지 않아서 아침에 산책도 해보고, 팔굽혀펴기도 부지런히 했다. 여행 일정이 아직 20일 넘게 남았는데, 이런 마음으로만 다닐 수는 없기에 여행 감수성을 밀어올리기 위해 무던히도 많이 애를 썼다. 다행히 그렇게 짝지와 다시 또 재미나게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된 줄 알았는데, 스위스에서 결정적 위기가 찾아왔다.

스위스에서는 제네바에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에 묵었는데, 아파트 전체를 우리만 사용하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집엔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가 이미 살고 계셨다. 호스트의 지인인 것 같은데, 일반 아파트 같은 숙소에 방 하나를 우리에게 주고 함께 생활을 공유하다 보니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영어도 잘하시고 짝지와도 한참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다 선한 분들이었는데, 집에 늘 계시다 보니 방 밖으로 왔다 갔다 돌아다니는 것도 신경 쓰였고, 저녁이나 아침 먹는 시간도 겹치니 주방도 시간을 나누어 써야 했다. 우리가 일찍 요리를 해 먹든지, 그분들이 식사를 하시고 난 다음에 요리를 해 먹든지 그래야 했다. 하루 종일 여행을 하고 오면 으레 지치기 마련. 그런데도 밥해 먹는 것도 불편하고 물건들도 여기저기 마음대로 늘어놓을 수 없었다. 저녁에도 거실엔 티브이 외에 아무런 조명을 켜지 않아 집 전체가 너무 어둡고 답답했다. 다른 에어비앤비 숙소에선 호스트가 출근을 하거나 숙소 공간이 분리되어 서로 마주치는 일이 잘 없었는데, 스위스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늘 집에 계시니 우린 방 안에만 있게 돼 갑갑함이 극에 달했다. 음식 해 먹을 때도 냄새가 신경 쓰이고, 다 먹은 뒤에 설거지를 하고도 식기를 닦아서 방으로 들고 들어갔다. 스위스에서 3박을 묵었는데, 거기서 나올 때 마치 탈출하는 것 같은 해방감마저 느꼈다. 여행에 숙소가 참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정말 좋은 분들이었는데, 우리 부부가 좀 소심하다 보니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불편하게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선물용 석고상. 2017.9. 15×21㎝
다음 여행지이자 이번 유럽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프랑스 트루아다. 그곳의 숙소가 전체 여행 일정을 통틀어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도 내 상태는 금세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숙소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둘째 날은 계속 휴대전화만 들여다봤고, 셋째 날에는 짝지가 바람이나 쐬자고 해서 숙소 근처 맥도날드에 가서 멍하니 시간을 때웠다. 애써 내 상태를 추슬러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아 그 상태 그대로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다시 운동도 다니고, 미술학원에 수채화 수업도 들으러 가고, 친한 지인들도 만나고, 유럽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보며 드로잉 작업도 해야 하는데,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예전에 받았던 개인상담 선생님에게 연락을 드려 일주일에 한 번씩 개인상담을 받고 있고, 드로잉 수업이 있을 때만 간신히 몸을 움직여 수업을 나갈 뿐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우울증과 무기력 상태는 나를 절망스럽게 한다. 무언가를 할 의지도 없고, 할 마음도 생기지 않고, 그냥 누워만 있고 싶어진다. 우울증에 빠지면 늘 이런 삶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앞으로도 이런 모습이 반복될 테고, 나는 뭘 해도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빠져버리게 되리란 걸 알고 있다.

룩셈부르크에서. 2017.9. 펜. 15×25㎝
그런 나의 글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상태를 기록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앞으로의 삶 속에도 우울증은 계속 찾아올 것이다. 우울증을 극복한 스토리이면 좋을 텐데, 나는 다만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기록할 뿐이다. 분명 누군가는 우울증으로 삶에 대해 낙관을 지니기보다는 비관을 가지고 있을 테고,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든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도 나의 글과 그림들이 희망과 꿈을 말하게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유럽 여행 뒤 아직도 고군분투 중이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여행 뒤 당장 작업을 진행해야 할 일들이 생겼는데, 그 작업과 드로잉 수업들을 마무리하면 다시 생산직 직장으로 돌아갈까 생각 중이다. 드로잉 전업작가로 사는 실험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나의 삶과 리듬에 어울리는 방법이 있다는 걸 이제 조금은 알게 되었다. 드로잉이나 글쓰기를 그만두진 않는다.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이 기록은 더 소중해질 테니까.

※ ‘박조건형의 일상드로잉’은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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