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 11월13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외치며 분신
|
|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정통성 부족을 경제개발로 메우려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8년 5월1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에 참석한 박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 소자 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
|
전태일이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게 보내는 편지. 자료출처 전태일재단
|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써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 (중략 )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 (중략 )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 (중략 )
|
평화시장 등에 난립한 소규모 섬유제조업체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은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좁은 공간에서 일해야 했다. 사진은 1960년대 다락방의 모습. 도서출판 <이매진> 제공.
|
|
전태일이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을 상대로 근무 환경과 임금 문제 등을 조사한 뒤 정리한 메모. 자료출처 전태일재단
|
“1달 920시간중 372시간 휴일은 매달 첫주일과 삼주일 2일 . 국제 근로 기준의 2배에 해당하는 시간임 .”
“평화시장 종업원 중 경력 5년 이상 된 사람은 전부 각종 환자임 . 특히 신경성 위장병 , 신경통 , 루마티스가 대부분임 .”
“공임은 우리나라에서 여기보다 더 싼 데가 없음 . 경영주들은 서로 경쟁을 직공들의 공임에서 함 . 하루에 15시간을 작업하고도 1개월 급료가 10000원밖에 안됨 .”
|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 형식의 편지. 자료출처 전태일재단(왼쪽)와 서울 청계천 주변에서 빈민구호활동을 했던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가 1973년 7월에 찍은 평화시장 봉제공장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메마른 인정을 합리화시키는 기업주와 모든 생활 형식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 당하고 오직 고삐에 메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노동자들이 )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
“합법적이 아닌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 그런데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은 알지를 못합니다 .”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 번영을 이룬 것은 (중략 )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중략 ) 이 모든 문제를 한시 바삐 선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
|
전태일이 1970년 3월 7일 쓴 일기. 자료출처 전태일재단
|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
무엇을 --제품 계통에서 근로자를 위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일
누구와 --제품 계통에 종사하는 어린 기능공들과
언제 --1970년 . 음력 6월달 이전에
어디서 -- 서울평화시장에서
이 일을 하려면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가 ?
▲ 1969년 4월달부터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
이 문제는 1968년 12월달에 착상한 것이다 . 나 자신이 꼭 해야 될 문제로 생각했다 .
▲그러나 1969년 서울특별시 근로감독관실에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심사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나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
-1970년 3월 7일 일기 -
|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삶을 그린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
전태일이 당시 평화시장 실태조사를 위해 돌렸던 설문지. 자료출처 전태일재단(왼쪽)와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열악한 노동환경. <한겨레>자료사진
|
|
1970년 10월 7일자 <경향신문> 보도.
|
참고문헌
전태일 재단 공식 누리집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 전태일
월간 ' 박정희 ' 창간특집호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 이병천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