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신현호의 차트 읽어주는 남자
⑧ 유리천장
지난 3월8일은 유엔이 공식 지정한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하지만 마냥 축하하고 기뻐하는 자리가 되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최근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미투’(#MeToo)를 통해 드러난 여성 억압의 민낯은 여전히 갈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은, 많은 분들이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다보스 포럼으로 잘 알려진 세계경제포럼은 2006년부터 매년 <글로벌 젠더 격차 리포트>를 발간해 오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발간된 보고서에 의하면 젠더 격차가 오히려 확대되었으며, 특히 경제적 영역은 2008년 이후 최하 수준으로 하락해 이 추세대로 간다면 경제적 영역의 격차 해소에 무려 217년(!)이 걸릴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한국은 조사 대상 144개국 중에서 118등으로 고소득 국가 가운데 일본(114등)과 함께 이례적으로 최하위권에 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지표의 적절성을 두고선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상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한정해서 보면 여러 기관의 다양한 젠더 격차 지표에서 공통적으로 한국이 최하위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변명의 여지가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한국, 이사회 여성 비율 ‘최하위’
[그림1-A]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오이시디 국가를 대상으로 산정한 ‘유리천장 지수’로, 노동 참여, 승진, 보수 등 경제적 측면에서 여성의 지위를 측정한 것입니다. 숫자가 높을수록 남녀 간 평등에 가깝습니다. 한국은 2013년 첫 발표 이후 단 한차례의 예외도 없이 꼴찌였습니다. [그림1-B]는 성별 임금격차로, 숫자가 높을수록 불평등하다는 뜻입니다. 역시 한국의 격차가 가장 심각합니다.(오이시디, <젠더 평등을 항하여>, 2017)
‘이코노미스트’ 산정한 ‘유리천장지수’한국, 2013년 첫 발표 이래 늘 ‘꼴찌’
기업이사회 여성 비율도 2%대 그쳐
그나마 절반은 소유주의 배우자·딸 성별 임금 격차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여성의 노동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아서일 수도 있고, 동일노동에 대한 성별 임금차별이 배경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에서 제시된 오이시디의 임금 격차는 각국의 전일제 남녀 노동자의 중위 임금을 비교한 것이므로, 단지 노동시간 차이가 주된 요인은 아닐 듯합니다. 그리고 한국은 제도적으로는 ‘남녀고용평등법’ 등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있어, 동일노동에 대한 임금차별이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된 이유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소득이 높은 직종과 직위에서 배제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배제는 명시적이지 않으므로 차별을 인식하기 쉽지 않은, 보이지 않는 장벽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성의 발전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이라는 표현은 적절해 보입니다. 하위직급의 경우 여성이 거의 절반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직급이 오를수록 여성의 비율은 뚜렷하게 낮아집니다. 공직 최종단계인 고위공무원에 이르면 여성 비율이 5%에 불과하고 기업 이사회 여성 이사 비율은 2%대로 오이시디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최하위권입니다. 더군다나 여성 이사 중 절반 정도는 기업 소유주의 배우자나 딸로, 여성이 오로지 능력을 인정받아 이사회에 진출하는 비율은 고작 1%대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여성 고위공무원 늘수록 정부의 ‘질’ 개선 유리천장은 여성에게 차별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기업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글로벌 금융기관인 크레디스위스가 전세계 3000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여성 경영자가 기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방대하게 조사한 바 있습니다.(크레디스위스,
인도도 ‘최소 한 명 이상 참여’ 못박아
미혼 여학생의 ‘희망연봉’ 외려 낮아
일상의식 속에 유리천장 존재 시사 마지막으로 세번째 범주는 이사회의 여성 할당 비율을 법으로 규정하는 등 엄격한 규제를 도입한 국가들입니다. 노르웨이가 효시입니다. 노르웨이는 2006년 이사회에 40% 성별 쿼터를 도입했고, 그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서 유사한 제도가 확산됐습니다. 인도는 이사회에 최소한 한 명의 여성이 반드시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보듯이, 이사회에 여성 참여를 확대하려는 노력은 여러 나라에서 진행 중이고, 정부의 노력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실제 여성 비율 차이도 상당합니다. 이제 우리도 이사회에 여성 참여를 높이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이사회 여성 참여율이 세계 최하위 수준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필요성은 매우 커 보입니다. 일상 속에 뿌리내린 유리천장 유리천장이 정부나 대기업만의 문제이거나, 혹은 공식적인 제도 개선만이 그 해결책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유리천장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꽤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마리안 베르트랑 교수 등 시카고대학과 싱가포르국립대학의 경제학자들은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분석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젠더 정체성과 가족 내 상대 소득’, <쿼털리 저널 오브 이코노믹스>, 2015) 미국 부부를 대상으로 배우자간 상대 소득을 조사했더니, 예상대로 남편이 소득이 높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남편이 아내보다 약간 더 버는 경우는 매우 많았으나, 반대로 아내가 남편보다 약간 더 버는 경우는 이례적으로 적었다는 점입니다. 베르트랑 교수는 교육, 직업 등을 고려할 때 아내가 의도적으로 남편보다 적게 벌려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실증한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보다 더 많이 벌 기회가 있더라도 아예 취업을 하지 않거나 노동시간을 줄여 대응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남편보다 아내가 더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면 아내의 노동시간을 늘리고 남편은 노동시간을 줄여 가사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 당연히 ‘합리적’ 행동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아내보다 더 벌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자리잡고 있는 탓에 아내가 소득이 높을 경우 남편은 불편해하고 아내는 미안함을 느껴 오히려 아내가 가사에 쓰는 시간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 리어나도 버스틴 교수가 프린스턴대학과 하버드대학의 경제학자들과 함께 경영대학원 엠비에이(MBA) 과정을 다니는 여학생들을 상대로 수행한 연구도 흥미롭습니다.(‘아내처럼 연기하기’,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 2017) 이들의 관찰에 의하면, 미혼 여학생들은 시험이나 숙제에 있어서는 기혼 여학생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나 사례연구 경쟁 등 공개된 참여형 과제에선 기혼 여학생에 비해 성적이 낮았다고 합니다. 미혼 여학생들의 경우, 능력과 야망이 시험이나 숙제로는 주변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공개 참여형 과제에서는 모두에게 드러나게 되므로 동료 남학생(연인 또는 배우자 후보)에게 나쁜 신호를 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혼 여학생들은 이런 시그널 효과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고, 남학생들은 시험이든 공개 참여형 과제 모두 미혼과 기혼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연구자들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 경력개발센터에 본인의 희망 연봉, 노동시간, 포부 등을 등록하게 하면서 절반의 학생들에게는 학생들이 작성한 내용을 경력개발센터 가이드만 볼 것이라고 알려줬고, 다른 절반의 학생들에게는 가이드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회람할 것이라고 했는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남학생 및 결혼한 여학생들은 두 집단 사이에 차이를 보이지 않았지만, 미혼 여학생들은 가이드만 보는 경우에 비해 다른 학생들도 보는 경우 희망 연봉을 평균 1만8천달러 낮추었고 희망 주당 노동시간도 4시간 줄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보면 유리천장은 우리의 일상 의식 속에도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리천장이란 법과 제도만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고, 남성과 여성 모두가 일상에서 의식적으로 노력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유리천장을 깨는 것이 단순히 경제적 영역의 정의로움을 넘어서 직장 내 권력 관계와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성폭력을 줄이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영역에서 성차별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을 성원하면서 마치겠습니다.
▶ 신현호 데이터 분석가. 20년 동안 숫자와 차트를 작성하고 분석하는 일로 살아왔다. 연애 시절 차트 이야기에 몰두하다 썰렁한 남자로 몰려 차일 뻔한 뒤 충격을 받고 “차트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기치하에 아내를 겨우 설득했다. 그렇게 가다듬은 차트 이야기들로 독자와 대화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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