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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만은 76년 4월 ‘패밀리 아워’(가족시간대) 편성 규제에 따라 신설된 ‘어린이 명작극장’의 첫번째 작품 <엄마를 찾아서>로 연출 ‘입봉’했다. 세번째 작품 <달려라 삼총사> 출연진과 77년 용평스키장 촬영 때 모습이다. 왼쪽 둘째부터 신민경·송승환, 맨 뒷줄 왼쪽 홍종현·고석만, 앞에 박종범, 오른쪽 한 사람 건너 강남길·임예진 등이다. 고석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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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24회) ‘우리 모두의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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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만은 76년 4월 ‘패밀리 아워’(가족시간대) 편성 규제에 따라 신설된 ‘어린이 명작극장’의 첫번째 작품 <엄마를 찾아서>로 연출 ‘입봉’했다. 세번째 작품 <달려라 삼총사> 출연진과 77년 용평스키장 촬영 때 모습이다. 왼쪽 둘째부터 신민경·송승환, 맨 뒷줄 왼쪽 홍종현·고석만, 앞에 박종범, 오른쪽 한 사람 건너 강남길·임예진 등이다. 고석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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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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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유신정권은 방송의 파급력을 의식해 철저하게 통제했다. 75년 9월 방영된 문화방송 일일연속사극 <집념>의 제목을 대통령 박정희가 직접 작명해 하달할 정도였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김무생·전양자 주연)의 일대기를 그린 ‘집념’은 그 뒤 여러 차례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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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4월부터 모든 텔레비전에서는 정부의 ‘패밀리 아워’ 강제편성 정책에 따라 오후 5시 방송 시작부터 오후 9시까지 온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프로그램만 방송해야 했다. 쇼·예능·코미디·드라마는 방송을 할 수 없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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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고석만의 첫 연출작품인 <엄마를 찾아서>의 주인공 천동석(왼쪽)은 하루 만에 대본을 모두 외워 와 연출자를 놀라게 했다. 천재적인 아역배우로 80년대 초반까지 맹활약한 천동석은 지금은 국제적인 사업가로 알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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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어린이 명작극장’으로 연출 입봉한 고석만은 두번째 작품 <철이의 모험>부터 ‘런닝 메이트’처럼 여러 작품을 계속 만들었다. 왼쪽부터 당대 최고의 아역배우로 활약하던 홍종현, 강남길, 손창민, 신민경.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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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5월 방영된 <철이의 모험>의 주인공 콤비인 철이(홍종현·오른쪽)와 꺼벙이(강남길·왼쪽)가 어촌마을 폐선을 무대로 갖가지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으로, 어린이 공상 드라마의 효시로 꼽힌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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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고석만의 ‘어린이 명작극장’ 세번째 연출작인 <달려라 삼총사>은 초호화 캐스팅으로 시작부터 화제를 모으며 6개월간 장기 방영됐다. 왼쪽부터 삼총사로 활약한 손창민(박준 역)·박종범(창식이 역)·홍종현(김기남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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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만은 1977년 <달려라 삼총사>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인 최불암·김혜자를 어린이 드라마에 고정 출연시켜 화제를 모았다. 1969년 문화방송 텔레비전 개국 첫 드라마 <개구리 남편> 때부터 부부로 등장했던 두 사람은 78년 <당신>에서도 부부로 호흡을 맞춰 그해 백상예술상을 나란히 받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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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 국장 “박 대통령 친필이야” 76년 4월부터 ‘패밀리 아워’ 강제편성
오후 5~9시 교양·다큐·뉴스만 ‘어린이 명작극장’ 연속극 연출 맡아
윤혁민 각색 ‘엄마를 찾아서’로 ‘입봉’ ‘철이의 모험’부터 나연숙 작가 ‘단짝’
76년 ‘달려라 삼총사’ 초호화 캐스팅
최불암·김혜자 ‘부모역’…처음엔 거절
“자식들에게 드라마로 선물” 설득 성공 77년 인기 청소년극 ‘제3교실’ 맡아
교실 울타리 벗어나려니 ‘5대 금기’
‘판자촌 거지 리어카 지게 군인’ 불가 방송이 나가자 반향이 컸다. 구로공단의 ‘여공들’은 다음날 아침 눈이 부어 창피했다고들 했다. 그때만 해도 신문이 방송 관련 기사에 인색했는데, <조선일보>(정중헌 기자)는 곧바로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평을 실었다. 이례적이었다. 그 뒤 여러 언론의 칭찬 기사가 쏟아졌다. 임상원 교수는 ‘리얼리즘을 살려가는 드라마’라 호평하였고, 정일몽 평론가도 ‘청소년 이해에 도움 되는 드라마’라 평했다. 한편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선정한 ‘가장 바람직한 드라마’로 <제3교실>이 뽑히기도 했다. <제3교실>이 소외계층을 찾아가는 발길은 일년 넘게 끊임없이 이어졌다. 버스 안내양의 눈물을 그린 ‘기름꽃’ 2부작. 소년원에 갇혀 있는 문제 청소년 이야기 ‘100회 특집―돌기둥’. 고아원 형제의 ‘새벽바람’ 4부작. 소외된 노인과 버려진 청소년의 교감 ‘학 노인’. 성인이 된 고아의 문제점을 다룬 ‘달무리지네’…. 나 작가는 실존적 화두로부터 출발한 문제의식을 사회와 역사의 지평으로 확대해 나갔다. <제3교실>은 가장 사회성이 강한 사실적 드라마로 정착하기 위해 리얼한 표현을 생명으로 하는 야외 로케이션에 과감한 시간과 열정을 들였다. 그것은 시간적 공간적 결정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직업군도 다양했다. 학생부터 불량 청소년, 직업 청소년, 권투 선수, 어린 파출부, 경마장의 기수, 초보 드러머, 배우 지망생, 음악다방의 디스크자키…, 항의도 많았고, 격려도 넘쳐났다. <제3교실>이 발굴해 배출한 배우도 많았다. 진유영, 김보연, 길용우, 송승환, 임예진, 문영애, 송경철 그리고 연극배우 추송웅, 이영하도 이때 처음으로 안방극장에 진입하였다. 극장에서도 ‘하이틴 영화’가 덩달아 붐을 이뤘다. [%%IMAGE13%%] <제3교실>의 성가가 비등점에 오를 무렵, 임성기 국장이 나 작가에게, 어린이가 주인공이 되는 일일연속극을 써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작가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게 콤비가 되어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연출 입봉 2년차에 간판 연속극의 연출이 된다? 생각만 해도 떨렸다. 나 작가는 작심했다. 그리고 곧 시놉시스 작업에 들어갔다. 어느 달동네 이야기를 쓰고 싶다 했다. 그즈음 내게는 영화 쪽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영화 제작자로 막강했던 곽정환 사장의 제의였다.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듣는 순간 심하게 흔들렸지만, 첫마디에 정중히 사양했다. 그 뒤로도 두세번 만나 증폭된 제안을 들었지만 거절했다. 내심 나 작가와 일일연속극 연출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포천 부장이 나서며 일이 꼬였다. 김 부장은 라디오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였던 김수현 작가를 내밀었다. 그때 김 작가는 문화방송에 기여한 공적도 컸던 터라 결정은 힘들지 않게 났다. 김 작가의 승리. 이에 나 작가는 심한 배반감에 떨며 동양방송으로 옮겨갔다. 이때 나온 작품이 <야 곰례야!>(1979년). 크게 성공하며 문화방송에 일격을 가했다. 문화방송은 아팠다. 대학 시절 ‘편성론’ 첫 강의 때가 생각난다. 배준호 교수의 한마디 “방송은 반 발짝만 앞서가야 한다. 두 발짝 앞서가면 못 쫓아오고, 한 발짝 뒤처지면 사회적 패악이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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