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연맹 학살사건은 개인에 대한 국가기관의 조직적·집단적 기본권 침해이며, “처형자 명부 등을 3급 비밀로 지정함으로써 진상을 은폐”시킨 채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 재판을 통한 ‘채무이행을 거절’토록 했으며, 나아가 유족들을 수십년 동안 연좌제의 사슬로 얽었다. 이 사건은 ‘공인된 폭력기관’인 국가가 특정 집단에 자행한 제노사이드(genocide) 혹은 집단학살(massacre)에 해당되며, 정치적 학살(Politicide)로 정의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한때 한-미 간에 쟁점이 되었던 노근리 사건 진상조사에 관여한 적이 있다. 거의 20년 전 일이다. 노근리 사건이란 6·25 초기 충북 영동군 노근리 쌍굴다리 밑에 피난하고 있던 수백명의 민간인이 미군에 의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대부분이 노약자·부녀자들과 유소년들이었다. 일찍부터 유족들이 이 ‘고의적’ 전쟁범죄 사건의 진상조사와 법적 처리를 요구했으나 번번이 묻혀버렸다.
유족들의 끈질긴 호소는 1999년에 한·미 교회협의회의 협조와 <에이피>(AP) 통신의 폭로로 이어져, 미국 정부가 이를 더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미 양국이 각각 노근리 사건 대책단과 자문위원단을 결성하고 공동으로 진상조사에 임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당시 미 제25사단장 윌리엄 킨의 작전명령서 등을 들어, ‘미군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정도의 진상보고서라도 채택해야 한다는 우리 측의 끈질긴 주장조차 무산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책임을 묻지 못한 채, 임기 말의 클린턴이 형식적으로 사과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필자가 노근리 사건 진상조사에 관여하게 된 것은 역사 공부를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역사란 아득한 먼 옛날의 사실을 다루는 것인 줄만 알았던 필자에게 노근리 사건은 6·25를 전후한 시기에 곳곳에 비극이 벌어졌다는 현실을 각성시켜 주었다. 더 충격을 준 것은, 그 시기에 동족에 의해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들이 수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구10·1사건(1946), 제주4·3사건(1947), 여순사건(1948), 더 나아가 정부가 조직적으로 벌인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1950)과 ‘국민방위군 사건’(1951), ‘거창 양민학살 사건’(1951) 등이다. 이런 비극을 외면한 채 수백년 전의 ‘태정태세문단세’만 음풍농월하듯 외우던 역사 공부에 자괴감도 가졌다.
6·25 중에도 무수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지만, 수만 내지 수십만의 희생을 가져온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전쟁 발발 직후에 경찰과 군, 우익 청년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진 집단학살 사건이다. 집단학살이 여러 곳에서 조직적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아 고위층의 일정한 지시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국민보호선도연맹’은 ‘국민보도연맹’, ‘보도연맹’ 혹은 약칭으로 ‘보련’으로도 불렸다. 이 연맹의 결성은 ‘여순사건’(1948.10.19) 후의 국가보안법 제정(1948.11.20)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국가보안법 제정 6개월 후에는 이 법 제정에 반대한 노일환 의원 등 13명이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됐고, 이 법 시행 후 1년간 12만명을 잡아들였으며, 검찰이 1년간 기소한 10만건 중 8할은 좌익사건이었다(한홍구, <대한민국史> 04권).
1년 후 이 법을 개정하면서, 사상전향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선고유예하고 보도소에 구금할 수 있는 보도구금제도를 만들었는데, 이 제도가 보도연맹을 설립하는 근거가 되었다. 보도연맹은 일제 말기 사상범 및 전향자 관리를 위해 결성된 대화숙이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상전향자를 위해 1949년 4월21일 만들어졌다. 과거 건준 치안대·인민위원회·전평 등 좌파로 분류되는 단체나 각종 문화예술단체, 조선공산당·남로당 등 좌파 정당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했다(김동춘, <전쟁과 사회>). 보도연맹 가입자의 상당수는 사상과 이념은 물론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민간인들이었고, 심지어는 비료를 타기 위해 가입했다. 가입자는 전국 10만명에서 30만명으로 추산되었다.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집단학살은 6·25전쟁 발발 직후에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49년 혹은 1950년 3~4월에도 있었다. 한국전쟁은 이런 학살을 전국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25가 나자 개성에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 측과 협력하여 우익 인사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보도연맹원 학살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제도·선우종원과 함께 보도연맹 창설과 운용에 깊이 관여한 사상검사 정희택은 6·25 후 서울의 보도연맹원 1만6800명을 상부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장악하고 있었다고 했고, 북한군 점령기에 보도연맹원이나 서대문형무소 안의 좌익범 중에서도 인민군에 부역한 사람이 적었다고 하는 증언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을 계기로 상부로부터 요시찰인과 형무소 경비에 대한 공문이 여러 차례 하달되었고, 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도 서두르게 되었다. 이승만이 “반국가죄는 조속히 엄격하게 처벌하라”, “반역도배들이… 불법한 행동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언급한 것은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을 공식화시킨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보도연맹원 학살과 관련해, 대전 대구 경남 등 평택 이남 지역에서는 형무소의 재소자 학살이 뚜렷했고,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대전형무소에서는 3천명 정도가 구금되어 있었는데, 그중 1800명이 7월 첫째 주 3일간에 처형되었다. 이를 목격한 형무관은 경찰과 헌병이 미리 파놓은 300여 미터의 2개 구덩이에 1800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번갈아가며 사격을 가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대구형무소에서는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400여명을 제외한 1400여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김천형무소에서는 최대 650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안동형무소에서는 최소 600명 이상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었고, 부산 지역에서도 최소 1500여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집단사살되었거나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되었다. 마산 및 그 밖의 형무소에서도 수십명에서 수백명이 학살되었다.
전국의 시·군 등의 행정 단위에서도 이 같은 학살이 자행되었는데, 각 단위마다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1천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2~3일 전에 소집되어 창고나 학교, 특수부대 지하실 등에 격리수용되었던 이들을 산골짜기로 옮겨 죽이고 매장하거나 수장시켰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희생된 민간인 수가 1800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했다.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에서 발굴된 인골도 400~500명 혹은 1천명이나 된다고 한다.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은 경남 지역이 자심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개인에 대한 국가기관의 조직적·집단적 기본권 침해이며, “처형자 명부 등을 3급 비밀로 지정함으로써 진상을 은폐”시킨 채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 재판을 통한 ‘채무이행을 거절’토록 했으며, 나아가 유족들을 수십년 동안 연좌제의 사슬로 얽었다. 이 사건은 ‘공인된 폭력기관’인 국가가 특정 집단에 자행한 제노사이드(genocide) 혹은 집단학살(massacre)에 해당되며, 정치적 학살(Politicide)로 정의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또 인도주의와 민주적 절차를 위반했고, 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박탈했으며,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했던 사건이기도 하다.
‘보도연맹 사건’ 등에서 보듯이, 해방 후의 한국사는 갈등과 희생으로 점철했다. 이 아름다운 산하 처처에 원통한 주검들이 울부짖고 있다. 아직도 신원(伸寃)되지 않은 혼령들은 유족들의 포원을 앞세워 배회하고 있다. 이제는 이들을 위로할 때가 되었다. 먼저 원혼들에게 용서를 빌고 화해를 공손하게 청하고 유족들에게도 무릎을 꿇자. 학살의 원인과 경과, 학살자들을 찾는 것은 전문 연구기관에 맡겨 장기적인 과제로 삼고, 우리 세대 전체가 죄인 된 모습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 앞에 다가가 용서를 빌자.
거국적인 ‘화해의 날’을 제정하여 용서와 화해를 일상화하고, 원혼들이 떠나지 못하는 학살 장소를 찾아 해원의 예를 행하고 용서를 비는 비를 세워 후세들에게 전하자. 지금까지 한시적으로 두었던 ‘진실화해’ 기구를 국가의 상시기구로 만들어 과거와의 화해를 위한 진실규명에 나서자. 서중석의 말대로 이제 “기억과 참회는 한국 사회의 의무다”. 이게 나라다운 나라, 국격을 높이는 길이다. 우리 안의 상처를 싸매는 일은 다가올 남북 화해에 대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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