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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15 20:31 수정 : 2018.03.15 21:40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④폴록의 <가을의 리듬>과 프랙털

미국 오리건대학 물리학자 리처드 테일러 박사는 폴록의 그림에서 숨겨진 패턴을 분석하여, 무질서한 듯한 패턴이 실은 ‘질서’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질서는 ‘프랙털’이었다. 프랙털은 1975년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가 발견한 ‘질서와 혼돈의 중간 지점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자기 복제 유사성이 있는 도형 패턴’을 말한다. 테일러 박사는 1999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이 결과를 발표하여 예술과 물리학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잭슨 폴록의 <가을의 리듬>(1950년 작).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1942년 페기 구겐하임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예술계의 주목을 받기 전까지, 미국을 대표하는 추상 표현주의 예술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은 그저 평범한 화가였다. 그가 현대 미술의 대가로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전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기법을 착안했기 때문이다.

폴록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흘리거나 뿌리는 ‘드립 페인팅’(Drip Painting)을 최초로 개발했다. 너무나 유명한 그의 기법은 1943년부터 1952년까지 전성기를 맞는다. 당시 미술계는 즉각적으로 새로운 예술의 범주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의 유명세는 미술의 중심을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올 정도였다. 1956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변덕스러운 천재 예술가로서 수많은 독창적인 작품을 남겼고, 현대 미술과 추상 표현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한 폴록의 대표작 <가을의 리듬>(Autumn Rhythm)이다. 이 작품은 그의 미술적 기술과 감성이 가장 성숙했던 1950년 10월에 제작됐다. 검은색 페인트가 복잡한 선의 골격을 이루고, 흰색, 갈색, 청록색 선이 복잡한 그물을 구성해 시각적 리듬과 공간적 감각을 부여했다. 수평과 수직의 대조적인 선들이 만드는 혼돈과 조화가 특징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비현실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을 풍경의 경쾌한 리듬처럼 색채와 선이 어울려 자연을 연상하게 한다.①

나는 지난주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하는 동안 현대미술관(MOCA)을 찾았다. 이곳에서 폴록의 작품 <넘버 1>(Number 1, 1949년 작)을 직접 감상할 수 있었다. 현대미술관에는 모두 네 점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 단연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 <넘버 1>이다. 폴록의 작품은 실제로 볼 때 감동이 더 크다. 멀리서 보면 복잡하고 무질서한 패턴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서서 보면 다양하고 독특한 패턴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 마치 우주 멀리서 지구를 보면 별로 큰 특징이 없지만 가까이 갈수록 지표의 다양한 모습이 보이는 것과 같다. 작고 다양한 패턴들이 모여 큰 패턴들을 이루며 조화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폴록의 드립 페인팅은 당시 전통적인 화법에는 없던 네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 그림 작업에 이젤, 팔레트, 브러시를 사용하지 않는다. 둘째, 고급 물감 대신 값싼 공업용 페인트를 사용한다. 셋째,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수평적으로 작업한다. 넷째, 색채의 그물로 관찰자의 시선을 끊임없이 이끌어 구성 요소 전체로 초점을 분산시킨다.②

폴록이 새로운 미술의 양식을 개척할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일까? 나는 폴록의 성공을 그가 예술가지만 ‘과학자처럼’ 물질과 자연을 탐구했기 때문이라 믿는다. 그는 그 당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과학을 예술 작업 과정에서 ‘직관적’으로 터득했다. 두 가지 근거를 들 수 있다. 하나는 그가 물감을 조합하고 제어할 줄 알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자연의 프랙털을 작품에 추구했다는 것이다.

흩뿌려진 페인트서 발견한 물리법칙

일부 미술사학자와 물리학자들은 폴록의 작품이 그저 우연의 산물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 보스턴대학 미술사와 하버드대학 수학자로 이루어진 공동 연구팀은 폴록의 작품을 분석하여 그가 페인트를 캔버스 위에 흩뿌리는 방식에서 물리법칙을 찾아냈다.③ 연구팀은 빨간 페인트의 흔들리는 선과 소용돌이 모양이 특징인 작품 <무제>(Untitled, 1948~49년 작)를 분석하여, 두꺼운 유체가 로프의 코일처럼 스스로 접히는 ‘코일링’(Coiling)이라는 유체 불안정성 때문에 독특한 형상이 만들어져 있음을 알아냈다. 유체의 형태는 점도와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점성이 높은 액체는 빠르게 움직일 때 직선으로 떨어지지만 움직이는 평면에 천천히 부으면 구겨지거나 로프 형상을 이룬다. 우리 일상생활에선 꿀을 떨어뜨릴 때 바닥에 꿀의 줄기가 돌돌 말리는 코일링을 볼 수 있다. 이 현상을 다루는 최초의 물리학 논문은 1950년대 후반에 나왔다. 하지만 폴록의 1948~50년 작품을 보면 그가 이미 이 모든 것을 알았던 것 같다.

폴록은 여러 종류의 페인트를 잘 섞어서 코일링 효과를 적절히 조절했다. 브러시를 사용하거나 페인트를 붓는 대신, 막대로 페인트를 찍어 올려 연속적인 물줄기를 만들어 캔버스로 흘려보내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팔을 다른 속도로 움직이며 코일링의 양을 알맞게 조절할 줄도 알았다.

폴록의 작업은 물리학자가 유체역학 실험을 하는 것과 꽤 비슷했다. 물질의 특성에 따라 여러 조합을 고려해 최적의 조건을 찾는 과학 실험 같았다. 그는 깨닫지 못했을 테지만, 유체역학을 어떻게 활용할지 ‘직관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폴록은 드립 페인팅 기법을 고안하면서 결과적으로 물리법칙을 활용한 셈이다.

잭슨 폴록의 <넘버 1>(1949년 작). 미국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소장

자연을 닮은 ‘프랙털’ 패턴

미국 오리건대학 물리학자 리처드 테일러 박사는 폴록의 그림에서 숨겨진 패턴을 분석하여, 무질서한 듯한 패턴이 실은 ‘질서’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질서는 ‘프랙털’이었다. 프랙털은 1975년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가 발견한 ‘질서와 혼돈의 중간 지점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자기 복제 유사성이 있는 도형 패턴’을 말한다. 폴록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던 시기는 망델브로가 프랙털을 발견한 때보다 약 20~30년 앞선다. 폴록의 기법이 성숙할수록 프랙털의 복잡성은 매년 꾸준히 증가했다. 테일러 박사는 1999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이 결과를 발표하여 예술과 물리학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④

프랙털은 정수가 아닌 ‘프랙털 차원’을 가진다. 선은 1차원, 평면은 2차원, 부피는 3차원이다. 종이 위에 그려진 프랙털 선은 1차원과 2차원의 중간 차원을 갖는다. 선의 복잡성이 클수록 선은 2차원에 가까워진다. 1943년 폴록의 초기 작품들은 프랙털 차원이 1에 가까웠다. 이후 10년 동안 폴록의 그림에서 프랙털 도형은 더욱 정교해져 차원이 1.7까지 증가했다. 이 결과는 폴록이 프랙털을 숙달하는 데 오래도록 노력했음을 뜻한다.

인간은 1.4 정도의 프랙털 차원에 익숙하다. 자연에 가장 널리 퍼진 프랙털 도형은 1.3에서 1.5 사이의 프랙털 차원을 가진다. 인간의 뇌는 혼돈과 질서 사이에 있는 자연의 프랙털 패턴을 좋아한다. 테일러 박사 연구에 따르면, 프랙털 도형을 보고 있으면 마음과 신체의 생리적 스트레스가 60%까지 감소될 수 있다고 한다.⑤ 프랙털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 약을 쓰지 않고도 스트레스를 현저히 줄일 수 있다.

예술과 과학은 자연을 추구한다

프랙털은 구름, 번개, 해안선, 파도, 나뭇잎, 강줄기, 은하계 등과 같이 자연의 형태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인간의 뇌는 자연을 닮은 패턴을 편안하게 느끼며 생리적 공명을 일으켜 안정을 찾는다. 프랙털은 자연의 본질이다. 무질서하게 보이는 폴록의 그림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의 패턴이 자연을 닮았기 때문이다.

물질과 자연을 탐구했던 폴록의 경우처럼, 과학자가 자연의 비밀을 밝히기 전에 예술가가 먼저 자연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은 인간에게 ‘아름다운’ 미적 대상이며 예술가는 ‘본능적으로’ 예술로 자연을 모방한다. 과학자도 자연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이해하고 활용한다. 자연을 탐구하고 끊임없이 그 본래 모습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예술과 과학의 본질은 같다.

*참고 자료:
①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488978.
② https://www.moca.org/collection/work/number-1.
③ A. Herczynski, et al. Physics Today 64, 32-36 (2011).
④ R. Taylor, et al. Nature 399, 422-422 (1999).
⑤ R. Taylor, Scientific American 287, 116-121 (2003)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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