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⑥몬드리안과 직선
그의 관점에서 인간의 비참함과 사회적 부당함은 불평등의 결과였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불평등이었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그의 예술 목표였다. 그는 크기와 색상과 관계없이 구성 요소가 ‘동등’하다면 항상 조화로운 구성이 가능하다 믿었다. 구성 요소가 서로 동등성을 획득할수록 인간 사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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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몬드리안의 <빨강, 검정, 파랑, 노랑, 회색의 구성>(192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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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추상 예술의 거장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의 그림은 단순하고 독특하다. 강렬한 검은색 선이 만들어내는 단순한 기하학적 패턴에 삼원색·무채색이 채워진 직사각형 그림을 보면 누구나 그가 그린 그림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이렇게 단순한 그림을 그린 그가 미술사에선 가장 순수한 예술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가장 실용적인 예술을 탄생시킨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어떻게 저런 단순한 그림이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 걸까? 저 단순한 패턴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 단순함에 도달하기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몬드리안의 예술 세계엔 현대미술과 과학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실마리가 숨어 있다. 이제 그의 삶과 작품을 살펴보자.
그는 1872년 네덜란드 한 시골의 엄격한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마추어 화가였던 아버지와 화가였던 삼촌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 미술아카데미에서 당시 유행했던 차분한 색조의 정물화와 풍경화 같은 미술 양식을 배우며 평범하게 성장했다. 1911년 프랑스 파리로 가서 당시 혁신적인 미술 양식을 여럿 접했는데, 특히 미술계를 주도했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에 상당한 자극을 받았다. 1912년부터는 아예 입체주의에 정통하겠다는 다짐으로 본격적인 예술 인생을 시작한다. 1910년대 초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는 이미 상당한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흐름을 완전히 따라잡지 못했다. 1914년 네덜란드에 머무는 동안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 이후 5년 동안 파리에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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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본질에서 탄생한 새로운 예술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매우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그는 입체주의를 따라잡기 위해 전념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물의 형태가 수직과 수평의 대립으로 요약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 통찰은 그의 예술관을 완전히 바꾼다. 그가 발견한 수직·수평 패턴은 공간의 모든 위계를 없애고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아름다움으로 환원한다. 그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가장 두려워했던 추상과 평면성을 받아들여 입체주의와 전혀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킨다. 1915년~1916년에 그린 그림에서 그가 완전히 새로운 기하학적 패턴으로 전진했음을 알 수 있다.
[1]
그와 동일한 양식을 간파했던 예술의 동반자 테오 반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 1883~1931)를 만난 것도 이때쯤이다. 1917년 둘은 네덜란드를 기반으로 ‘데 스테일’이라는 이름의 예술 그룹을 결성한다. 데 스테일은 네덜란드어로 ‘De Stijl’, 영어론 ‘The Style’로 ‘스타일’ 또는 ‘양식’을 의미한다. 이들이 창안한 새로운 예술 운동을 ‘신조형주의’라고 하는데, 네덜란드어로 ‘Neo-Plasticisme’, 영어로는 ‘The New Plastic Art’이며 ‘새로운 조형 예술’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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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의 <승리의 부기우기>(1943~1944년). 네덜란드 헤이그 시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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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또 한 번 중요한 경험을 한다. 1919년 천문학자 에딩턴은 개기일식이 일어날 때 태양 중력으로 빛이 휘는 현상을 관측하여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이 소식은 파리에 널리 알려졌고 예술가들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3] 이 예술가 중에는 몬드리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또한 과학과 수학이 급격하게 발전하던 당시 유럽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는 과학처럼 예술에서도 보편적인 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의 형태 속에 숨겨진 불변의 실재를 예술로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의 기하학적 추상 회화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철학적 예술 이념을 견고하게 구축한다. 그는 물리적 자연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 추상 회화를 추구한다. 수직선과 수평선, 직선의 교차와 직사각형, 공간을 채우는 삼원색과 무채색의 조화를 탐구하며, 새로운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순수미술 장르를 개척한다. 1920년 그가 그린 최초의 신조형주의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 <빨강, 검정, 파랑, 노랑, 회색의 구성>을 보자. 가로와 세로의 검은 선이 교차하고 삼원색이 적절히 배치된 구성이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
그의 작품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기반이 되는 철학은 단순하지 않다. 그의 관점에서 인간의 비참함과 사회적 부당함은 불평등의 결과였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불평등이었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그의 예술 목표였다. 그는 크기와 색상과 관계없이 구성 요소가 ‘동등’하다면 항상 조화로운 구성이 가능하다 믿었다. 구성 요소가 서로 동등성을 획득할수록 인간 사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에게 예술은 불평등을 해소하는 수단이었다. 자유로운 예술이라면 구성 요소가 일정한 상호 동등성을 획득하고 순수한 관계를 회복하여 인간과 사회를 계몽할 수 있다. 그의 예술은 순수하고 동등한 ‘구성’을 예시로 보여주며 새로운 유토피아를 보여주는 청사진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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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새로운 이념을 알리고 싶어 100편이 넘는 글을 남겼다. 1926년 발표한 글 ‘신조형주의 일반 원리‘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회화의 기본 요소는 삼원색과 무채색의 직사각형 평면 또는 프리즘이다. 요소의 동등성이 중요하다. 크기와 색상이 동등한 가치를 가질 때 평형이 발생한다. 평형은 구성 요소가 배치되는 비율과 생생한 리듬을 만드는 관계에 의해 실현된다. 모든 대칭은 배제되어야 한다.’
[4] 실제로 몬드리안 패턴에는 반사 대칭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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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실용의 예술적 승리
1920년대 파리에서는 시공간이 결합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의 4차원 개념에 감탄하며 이 새로운 과학 지식을 자신의 예술에 통합하려는 예술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의 동반자 반 두스뷔르흐가 동적인 대각선을 도입한 것도 이 무렵이다. 과학적 보편성에 감탄한 몬드리안과 달리 반 두스뷔르흐는 회화 공간에 대각선을 도입하여 시공간의 존재를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몬드리안은 대각선을 파괴적인 요소로 간주하여 직선만을 고집했다. 극단적으로 예술의 본질과 순수함을 추구한 몬드리안은 대각선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신조형주의를 이끌던 둘은 대각선 도입을 두고 벌인 갈등으로 1925년 결별한다.
[3]
이후 몬드리안은 독자적으로 신조형주의를 발전시켜 나간다. 1920년대 신조형주의 회화 어휘를 거의 완성한 그는 1930년대에 이르러 선·면·색의 정체성까지 없애려 했다. 1940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이후 현대적인 도시 문화와 재즈 음악에 심취하며 점차 이전의 엄격한 구성 원칙을 버리고 화려하고 경쾌한 구성 방식을 채택한다. 1940년대에 그는 면을 구분한 검은 선을 삼원색으로 채우고, 선·면·색을 뒤섞는다. 초기 작품에서는 수직과 수평의 직선을 교차시켜 역동적인 정반합 대립을 추구했지만, 이제 그 대립의 관계를 다시 해체한 것이다. 당시 헤겔의 변증법을 접한 그는 공간의 역동적 긴장이 자연스럽게 평정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1]
1944년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마지막 유작인 <승리의 부기우기>(1943~1944년)에서 과거의 모든 시도를 뛰어넘기 위해 고심 끝에 마름모 형태의 그림 틀을 도입한다. 그가 마지막 작품에 ‘승리’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그는 대각선을 시도했던 옛 동료와 예술적 화해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직선을 고집했던 자신의 예술관(‘정’)을 반추하며 대각선을 도입했던 동료와 갈등(‘반’)을 거쳐 마지막 승리(‘합’)를 얻는다.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변증법적 완성을 이룬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전 작품들 또한 기울여보면 대각선이 나타나며, 직선과 대각선에 심미적 차이는 없다.
[6]
몬드리안은 신조형주의 이념을 통해 회화와 건축의 통합을 기대했다. 미술이 분해되어 건축을 통해 환경에 흡수된 유토피아를 꿈꿨다. 실제로 오늘날엔 그래픽 디자인과 건축 분야에서 몬드리안 패턴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현대적인 건물에서 몬드리안 패턴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신조형주의 이념을 3차원 물리 공간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와 논의가 활발하다. 그만큼 그의 기하학적 패턴은 보편성과 실용성이 뛰어나다. 몬드리안 패턴은 컴퓨터로도 쉽게 재현할 수 있다.
[7]
몬드리안은 사물과 공간의 본질을 파고들어 아름다움에 더 가까이 다가갔고 새로운 예술의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과학의 보편성에 영향을 받아 예술의 보편성을 찾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할 수 있었다. 순수와 실용을 모두 성취한 그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승리자가 아닐까.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참고 자료:
[1] 할 포스터 외, <1900년 이후의 미술사>(세미콜론)
[2] 강영주 외, <서양 미술 사전>(미진사)
[3] S. Michalowski and G. Smith, Nature 470, 38 (2011)
[4] L. Veen, International Journal of Art and Art History 5, 1 (2017)
[5] Editorial, Nature 555, 414 (2018)
[6] R. Taylor, Nature 415, 961 (2002)
[7] J. Stevanov and J. M. Zanker, Leonardo (in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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