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⑫ 백남준과 브라운관
젊은 백남준에게 브라운관은 상업화된 문화의 상징이며 비인간화된 기술을 풍자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매체였다. 다만 예술가로서 과학과 기술을 섭렵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젊은 그는 물리학과 전자공학에 그의 재능을 기꺼이 할애하기로 결심하고 비디오 전문가 슈야 아베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나 기술자와 협업하며 자신의 예술적 지평을 확장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그는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도쿄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현대 음악을 전공했고 1958년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의 공연을 접하며 실험적 예술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1961년부터 조지 머추너스와 조지프 보이스와 함께 ‘플렉서스’ 운동을 주도했다. 라틴어로 ‘흐름’을 뜻하는 플렉서스는 예술의 사유화와 상업화에 반대하여 작품과 작가의 삶을 공유하는 예술 운동으로 “목적이 없는 자유와 실험을 위한 실험”을 추구했다. 백남준은 1960년대 초반 독일 가정에 보급된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작품의 매체로 착안하여 음악과 비디오를 결합한 새로운 미디어 아트를 개척했다. 1964년 뉴욕으로 이주 후 2006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1,2]
미디어 아트, 예술의 본질을 묻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면 로비를 지나 전시관으로 안내하는 램프코어 공간에서 거대한 브라운관 탑을 볼 수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1003개의 모니터를 5층 높이로 쌓아 설치한 거대한 작품 <다다익선>이다. 실제 설계와 설치는 건축가와 공학자의 도움을 받았다. 현대 미디어 아트를 대표하는 <다다익선>은 2003년 브라운관을 전면 교체하는 대대적인 보수에도 불구하고 브라운관 노후와 안전 문제로 현재 가동이 중단되었다.
브라운관 수명 문제는 브라운관 산업의 역사와 직결된다. 나는 한 전자회사에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브라운관 성능과 수명을 결정하는 핵심 부품인 산화물 음극 개발에 참여했었다. 독일 물리학자 아르투어 베넬트가 1904년 개발한 산화물 음극은 대표적인 전자빔 발생 장치로서 대부분 브라운관에 탑재되어 있다.[3] 전자빔이 화면에 도달하면 화면에 도포된 형광 물질과 반응하여 색채를 재현한다. 전자빔이 화면까지 도달하는 궤적은 전자석으로 정교하게 조정한다. 이것이 브라운관의 기본 원리다. 브라운관이 볼록한 이유는 전자석이 전자빔을 휠 충분한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브라운관 성능과 수명은 산화물 음극과 브라운관 진공도가 결정한다. 전자는 공기 분자와 부딪혀 산란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에, 브라운관은 높은 진공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브라운관의 가격과 성능 경쟁력을 동시에 높이려면 값싼 재료로 더 높은 성능을 얻어야 했는데 이는 수명에 불리했다. 난 성능을 극대화한 산화물 음극을 개발하면서 브라운관 수명을 예측하는 수학 모델도 함께 개발했다.[4] 나는 브라운관 기술 개발의 마지막 세대였다. 액정 소자나 유기 발광 소자 등 고성능 미디어 소자가 등장하면서 브라운관 산업은 퇴보를 거듭해 기술 개발과 생산이 중단되고 결국 시장에서 점차 사라졌다. 초기 미디어 아트 작품에 사용하는 브라운관 모니터도 대부분 단종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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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다다익선>(The more the better). 1988년 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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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삼원소>(Three elements). 2000년 작. 백남준 아트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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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1] M. Kemp, Nature 404, 546 (2000)
[2] M. Kemp, Nature 434, 308-309 (2005)
[3] G. Gaertner and D. den Engelsen, Applied Surface Science 251, 24-30 (2005)
[4] B. M. Weon and J. H. Je, Applied Surface Science 251, 59-6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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