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8.01 19:42
수정 : 2018.08.0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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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의 전시 <기록과 기억>.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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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이우성의 낙서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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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의 전시 <기록과 기억>.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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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할 때 박이소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다. 전혀 안 느낀 건 아니었겠지만 거의 느끼지 않았다. 그는 뉴욕에서 1980년대를 보냈다. ‘마이너 인저리’라는 미술 공간을 운영하며 이민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는데, 열등감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활동을 못 했을 것이다. 그는 눈부신 미술가였고 이론가였다. 그가 번역한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내 삶의 교과서와 같은 책인데,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술의 정의를 가볍게, 정말로 가볍게 뒤집는다. 그런데 설명하는 대신 묻는다. 이 책의 화법은 너무 사소해서 강렬하다. 물론 박이소는 역자이지 저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해하고 깨닫고 오래 생각하지 않으면 번역할 수 없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역자가 궁금해진다.
거듭, 박이소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아시아 작은 나라 한국의 작가였지만 미술가로서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대지가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았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활자로 정확하게 적을 능력은 안 되고, 다만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박이소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2004년 세상을 떠났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박이소의 전시 <기록과 기억>이 열리고 있다. 제목 그대로다. 박이소가 남긴 기록과 기억, 이를테면 작품 스케치, 메모, 드로잉 등이 전시된다. 착상이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되는가를 들여다보는 것은 당연히 재미있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 자꾸 나를 사로잡는 것은 ‘열등감’이다. 그는 미국, 유럽에 비해 소외된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나는 그가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알리고 싶어 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이 느낌 열등감, 소외감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자신은 괜찮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식과 감각, 어떤 태연함과 연민이 그가 남긴 기록과 기억에 분명히 남아 있다고 하면 거짓이 되려나. 모르겠다. 선 하나를 그릴 때도, 단어 하나를 적을 때도, 박이소는 무엇인가 초연해 있다. 그걸 ‘거침없다’라든가 ‘자유롭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그가 열등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시기 뉴욕에 있던 한국인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그 한국인 작가의 예술적 원동력은 열등감이었다. 그는 열등감을 동양의 세계관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해할 수 없다. 박이소는 무엇이었을까? 박이소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을까? 박이소는 더 조명 받아야 하는 작가다. 국제적으로도 그러한지는 내가 판단할 수 없고, 국내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왜냐하면 박이소와 같은 한국인 작가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박이소는 박이소뿐이었다. 전시는 12월16일까지 열린다. 천천히 여러 번 가볼 만하다.
이우성(미남 컴퍼니 대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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