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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지> 필화사건으로 구속됐던 작가 남정현(왼쪽 두번째)씨는 1967년 6월28일 서울지법 제1심에서 보안법 위반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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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람들 5-2
이 글에서 백낙청의 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면 ‘어울리지 않는 데’라고 할 독자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서울대 명예교수, 문학비평가, 계간 <창비>의 편집인으로서 학예 분야에서 그에 비견할 무게를 지닌 사람을 찾기 힘들 뿐더러 얼마 전까지 남북 민간교류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어려운 고비를 훌륭하게 넘긴 실천가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헤르무트 슈미트급의 ‘마허’를 고르라면 나는 백낙청을 제1후보로 꼽겠다. 여기서 말하는 백낙청은 지금의 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1960년대 초의 20대 ‘하버드 보이’다. 백낙청은 나의 ‘삼십이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고 달리는 나 같은 사람과 사귄 결과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사서 한 불운을 만났던 것이다. 아무튼 <조선일보> 사회부의 초년기자인 나는 1961~62년 용산, 남대문, 중부, 성동 등 4개 경찰서를 도는 경찰 기자였는데 중부경찰서에 들릴 적마다 틈나는 대로 백병원 바로 옆 그의 집을 찾곤 했다. 우리의 화제는 단순히 문학에 머물지 않고 정치, 국제문제, 역사, 철학 등으로 가없이 퍼져나갔다. 얼마 뒤 그가 미국에서 발간되는 진보적 성격의 계간지 몇 가지를 보여주며 이런 형태의 것을 내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즉석에서 좋은 아이디어라며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계간지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큰 노력과 출혈을 요하는 것인지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마허’와 ‘마허가 아닌 자’의 차이다. 나중에 그가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창간하는 데 내가 약간의 추렴을 한 기억은 있으나 원고 청탁, 교정, 인쇄소 출입 등 모든 일을 그가 혼자 한 것이나 다름없다. 주변에서 틈틈이 제작을 도와준 친구는 김상기와 이종구(조선일보 해직 기자, 전 무역협회 상무이사)다. 그로부터 조금 뒤의 일. 65년 5월 소설 <분지>가 박정희 정권의 비위를 거슬려 작가 남정현(앞줄 가운데)이 중앙정보부에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소설 제목이 ‘똥 땅’(糞地)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문단 주류의 보수·우익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창작 활동에 족쇄를 채우려는 정치권력의 월권행위에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지식인은 없었다. 그런 가운데 백낙청이 표현의 자유와 예술 활동의 자유가 침해되는 현실을 심히 우려하는 글을 <조선일보>에 썼다. 문화부장 남재희가 청탁을 한 것인데, 내가 백낙청을 추천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남재희와 백낙청, 나 이렇게 셋이 술자리를 한두 번 가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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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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