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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파리 시내 거리에서 <한겨레21> 취재진을 만난 정성배 파리 사회과학대학원 명예교수.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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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람들 6-3
내 힘으로 프랑스 지식인들을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파리에 도착한 지 석 달째 되는 4월 초, 나는 생 미셸가 소르본 건물을 찾아갔다. 서울서 읽은 <프랑스 혁명사>의 저자 알베르 소불(1914~82)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반원형 계단식의 ‘튀르고 강의실’에 들어가 앞자리에 앉았다. 조금 뒤 들어온 소불 교수에게 ‘한국의 기자이며 당신의 저술을 읽고 감명받아 강의를 듣고자 한다’고 하니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끝난 뒤 카페에서 한잔 나누자고 했다. 알베르 마티에, 조르주 르페브르에 이어 프랑스 혁명사의 대가로 손꼽히는 소불의 강의는 놀라울 정도의 웅변조였다. 간간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치며 조는 학생들의 이목을 끌려는 노력은 흥분 잘하는 우리나라 중·고교 역사 선생과 비슷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 같은 열혈투사들의 행적을 말하려니 자연히 저렇게 톤이 높아지는구나 싶었다. 파리 하층민의 ‘생 탕투안 거리의 과격파’(les sans-culottes de Saint-Antoine)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는 한 여학생에게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를 읽었느냐고 물었다. 학생이 고개를 젓자 돌연 소불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네, 물론이지요’라 대답하니 그는 나를 일어서게 해 소개하고는 손뼉을 치는 거였다. 학생들도 소불을 따라 손뼉을 쳤다. 미지의 프랑스 젊은이들로부터 박수를 받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박수 친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68년 학생혁명’이 한창일 적 파리의 시가지에서 돌을 던진 패들이겠지 …. 학기가 끝나는 6월 중순까지 소불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난 틈만 나면 서점에 들러 프랑스와 유럽 근대사 관련 책을 샀다. <르 몽드> 신문사에서 10월 한 달 동안 하게 될 직업훈련 프로그램 이전까지 유럽 근대사의 큰 줄거리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프랑스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르 몽드>를 사서 스포츠와 증권면만 빼고, 깡그리 읽는 것은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르 몽드>에서의 한 달 경험은 17년 뒤 <한겨레>의 창간을 준비할 때 많은 참고 자료가 됐다. ‘제목을 선정적으로 달지 말자’, ‘1면에 사진을 쓰지 말고 시사만화로 대체하자’, ‘마지막 면이 1면 다음으로 주목도가 높으므로 전면 광고는 절대 금지! 마감 임박해 들어온 기사를 싣자’는 것이 내 의견이었다. 창간 준비위 동료들의 호응은 제법 높았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의 신문지면 구성 모델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 신문이다. <르 몽드> 연수 기간쯤인가, 정성배(프랑스 국가박사, 국립사회과학대학원 명예교수)를 만났는데 그것은 나의 행운이다. 목포 출신의 정성배는 나보다 대학 입학이 4년 앞선 터라 20대 초에 만난 적은 없으나 동베를린 사건으로 서울에 끌려와 옥살이를 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파리에 되돌아온 그는 프랑스 총리실 직속 자료수집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외교관을 포함해 당시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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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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