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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는 1972년 8월3일 0시를 기해 기업사채를 월 1. 35%로 낮춰 3년 거치 4년 분할상환하는 것을 뼈대로 하는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15호’를 발표했다. 당시 태완선(가운데)경제기획원 장관이 발표문을 읽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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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람들 7-3
관변 먹물(집권세력에 줄이 닿았거나 대려는 대학교수 및 언론인)들은 7·4 남북 공동선언을 내걸고 10·17 유신쿠데타를 정당화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7·4 공동선언과 10·17 쿠데타는 논리상 모순될 뿐 아니라 사실 관계에서 서로 어긋나는 것인데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하긴 흰 것을 검다 우기며 그 짓으로 밥을 먹고 사는 족속이 자고로 농투성이 아닌 먹물이란 것은 너무 잘 알려진 일이다. 관변 먹물 이르되 “박정희의 첫 번째 쿠데타(5·16)는 경제 개발을 위한 것이고 두 번째 쿠데타(10·17)는 통일을 위한 것”이라 했다. 이런 궤변에 발 벗고 나서는 대학교수, 언론인들 상당수가 박정희에게 어여삐 보여 한자리씩 차고 나간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유신체제’하에서는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헌법에 규정했으니까. 그뿐인가. 청와대와 내각에 소위 일류신문 출신이 줄줄이 등용될 때마다 경사로 여기는 풍조가 생겼다. ‘동아일보’의 유혁인(동아 정치부장, 청와대 정무수석. 문공부장관)과 ‘조선일보’의 윤주영(조선 편집국장, 청와대 공보수석, 문공부장관)이 그 선례에 속한다. 중앙정보부 직원이 신문사에 상주하며 박정희 친위부대가 대학교를 군홧발로 짓밟는 사건(1971 10월의 수경사 고대 난입)이 벌어진 마당에 박정권 타도에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믿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분단 이후 처음 통일정책의 원칙으로 내건 7·4 남북 공동선언을 흰 눈으로 본다는 것은 민족적 양심으로 허용되겠는가 하는 회의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는 공동선언 한 달 뒤에 <8·3 기업 사채 동결령>(통칭 8·3 조치)을 내렸다. 불로 소득인 고리의 사채를 금지한다는 것은 사회정의 차원에서는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정말 헷갈리게 했다. 그해 유독 장마가 심했던 8월 한 달 남북 직통 전화 20회선을 가설한다던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가며 네 차례 남북 적십자 회담을 열었으니 이러다가 통일이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박정희의 영구 집권용 10·17 쿠데타를 준비하며 그에 반대하는 국민의 저항을 약화시키려는 노림수였다. 데모하다 제적당한 대학생들이 이력서에 고학력을 감추고 공장에 취직할 때 붙이던 ‘위장 취업’의 ‘위장’이란 말은 7·4에서 10·17에 이르는 100일간의 정책을 빗대 꼭 들어맞는다. 구좌파(舊左派, 편의상 7·4공동 선언이 나오기 전의 혁신세력을 그 이후의 민주개혁 세력과 구분하기 위한 내 자의적 표현)의 일부가 7·4 이후 박정희 지지로 돌아서면서 8·3 사채 동결령을 높이 평가했다. 입법부가 엄두를 내지 못한 고리 사채를 금지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박정희의 용단이란 이야기다. 하지만 60년대 중반 이후의 만연한 부패가 통제받지 않는 정치권력에서 연원한 것이므로 사채 동결령의 경제적 효과는 실상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큰 덩어리의 고리 사채는 권력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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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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