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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령관에 임명된 노재현 육군참모총장이 1972년 10월17일 정치활동목적의 옥내외 집회금지, 언론·출판·방송 등의 사전검열, 대학 당분간 휴교 등을 내용으로 하는 ‘포고1호’를 발표하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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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람들 7-4
언론의 자유가 압살당한 상태에서 기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검은 것을 검다고 쓰지 못하면 신문은 존재할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버젓이 신문사에서 밥을 먹고 있었으니 기자 초년 시절 경멸했던 고참들과 결국 마찬가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신문사를 그만두면 생계도 막막했으려니와 그보다는 세상이 ‘알아주는’ 기자직을 버린다는 것이 부끄러운 말이지만 너무나 아쉬웠다. 글쟁이인 기자가 제구실을 못할 바에는 이참에 아예 문청 시절의 꿈이었던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늦었다’는 느낌이 나를 지배했다. 10·17 쿠데타 이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끝에 신문사 밥을 먹는 있는 동안만이라도 언론자유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언론자유는 신문사의 주인이 지켜주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정치인이 목숨을 내놓고 확보해주는 것도 아니다. 직업인으로서의 기자에게는 검은 것을 검다고 쓰는 용기와 함께 언론자유를 지키고 적극적으로는 자유로운 언론 활동이 가능한 정치·사회적 환경을 조성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에밀 졸라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지식인들이 즐겨 입에 담던 그 멋있는 말 ‘앙가쥬망’(현실참여)이 피할 수 없는 외길이 돼서 내 앞에 버티고 있다. 지식인의 현실참여는 개개인의 총체적 결단을 통해 나오는 것이지만 의미 있는 결실을 맺으려면 다수의 현실참여가 불가결의 요소다. 그러므로 신문사 밖의 친구들을 더 자주 만났다. 1972년 여름 백낙청이 3년 간의 미국 체류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의 부재 중 염무웅(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이 계간 <창작과 비평>의 편집을 맡아 수고했다. 예전 종로 수송초동학교 건너편에 위치한 신구문화사 한구석의 창비 사무실에 간혹 들르면 염무웅 또래의 문인들과 마주쳤다. 소주를 나눈 문인으로 기억나는 얼굴은 작고한 시인 조태일과 소설가 이문구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이상 가깝게 지내는 채현국(효암학원 이사장). 백낙청이 미국에 가 있을 때 <창작과 비평>의 제작비는 발행을 맡았던 신동문(시인·전 신구문화사 상무·작고)이 꾸렸으나 편집책 염무웅은 원고료를 조변할 방법이 막막하여 자주 채현국을 찾아가 급한 불을 껐다. 채현국은 김상기와 서울대학 철학과 동기이며 한때 문학과 연극에 뜻을 두어 공채 1기로 KBS에 입사할 만큼 예능 열정이 대단했다. 그러나 부친(채기업·흥국탄광 창설자)을 돕기 위해 사업에서 발을 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정 연료의 주종이 연탄이었던 60년대에 채기업-채현국 부자의 탄광은 개인 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커졌다. 그는 맘에 맞는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며 헤어질 때 차비를 쥐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셋방살이를 하는 친구들에게는 조그마한 집을 한 채씩 사주는 파격의 인간이다. 모두 어려운 시절의 미담이므로 나는 주저하지 않고 채현국의 도움으로 내 집을 처음 마련한 언론 종사자 넷의 이름을 들겠다. 황명걸(<동아> 해직기자·시인), 이계익(<동아> 해직기자·전 교통부장관), 한남철(소설가·전 <월간중앙> 기자·작고), 이종구(<조선> 해직)가 곧 그들이다. 여기서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으나 흥국탄광에서 일했던 친구들 중 집 장만 하는데 채현국의 신세를 진 사람은 숫자가 훨씬 여럿이다. 남 집 사주는 이야기를 하다 빠뜨릴 뻔했는데 집은 아니더라도 부지기수로 채현국의 신세를 진 사람이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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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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