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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 <조선일보>에서 해직당한 ‘조선투위’ 기자들이 태평로 사옥 앞에서 ‘언론 자유와 복직’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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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람들 8-4
1975년 3월 <조선일보> 자유언론 투쟁과 이를 주도한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한 ‘3·6 사태’가 내게 걸렸던 두 번째 시험이다. ‘조선투위’의 주동 인물로 꼽히는 박범진·백기범·신홍범·정태기·성한표(<한겨레> 편집국장·논설주간 역임) 등은 나이와 언론계 입문이 나보다 4~5년 늦다. 하지만 그들은 6·3 세대인 터라 현실인식과 실천 면에서는 문청 출신인 나보다 앞서면 앞섰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이들과 조선일보 재직 중 가깝게 지낸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3·6 사태 직후 그 지면을 통해 ‘외부인들의 사주·선동’ 운운한 것은 70년대의 자유언론 운동 전체에 대한 모독이며 나아가 조선일보 전 역사를 통해 간간이나마 분출된 진실보도 노력에 침을 뱉는 자해행위나 마찬가지다. 반세기 가까운 언론 경험을 되돌아볼 때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기사를 쓰지 않거나 왜곡하는 사례들은 눈에 띄었어도 기자들이 다른 사람의 꼬임이나 선동에 넘어가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예는 본 적이 없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60년대에 영향력 있던 신문에 발은 디딘 기자들은 지적 수준이 높은 편이며 사리 판단에 어수룩하기보다는 영악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외부는 고사하고 다른 매체 종사자의 장단에 놀아났다는 것은 어림없는 소리. ‘선동’인지 ‘압력’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짓을 나는 딱 한 번 했다. 조선일보에서 1파, 2파, 3파로 대량해고가 진행되는 중에 신문 제작에 참여하던 정치부 차장(청와대 출입) 이종구에게 전화를 걸어 “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소리를 지른 것이 그거다. 그러나 대학 시절부터 절친했던 이종구가 내 전화를 선동으로 받아들였다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압력? 언짢은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 진짜 우정 아닌가. 그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어도 해직기자 그룹에 틀림없이 합류했을 터이다. 조선투위의 자유언론 활동을 이야기할 때 안줏감으로 자주 오르는 것이 이른바 ‘한성여관’ 사건이다. 해직기자들이 밤샘농성을 하던 곳으로 조선일보 사옥 뒷골목에 있던 여관이다. 그 어름 저녁나절 소주 한 상자를 들고 시인 김지하와 같이 거길 갔다가 때마침 조선일보 방우영 사장(조선일보 회장)과 맞닥뜨렸다. 그날 한성여관의 나는 관극자가 아니라 무대에 오른 배우와 비슷한 행위자(액터)였다. 거기서 벌어진 장면은 무대에 섰던 쪽이 아닌 관찰자들이 말해야 신빙성이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쓰지 않겠다. 긴급조치 시대 민주화 운동의 핵심과 주축이 어느 분야였나를 가리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쉽지 않다. 주축과 핵심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 다양한 직종, 다양한 연령층이 어울렸다고 해야 옳다. 안온한 세월이었으면 일생을 두고 서로 마주치지 못했을 사람들, 이를테면 변호사·목사·신부·여성운동가·노동운동가·농민운동가·대학교수·해직언론인들이 서로 사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보다 스무 살 연장인 변호사와 목사가 있는가 하면, 스무살 연하 제적학생도 있었으니 중국 문혁(문화대혁명) 시대 구호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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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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