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가에서 심복 김재규에게 저격당한 박정희 대통령의 유해가 청와대를 떠나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
세상을 바꾼 사람들 8-8
긴급조치 말기 개신교 쪽의 젊은 활동가들이 왜 그렇게 나를 끌어내려고 애썼는지 기회가 닿으면 그들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 기독학생총연맹(KSCF) 총무 안재웅(실업극복국민재단 상임이사), 손학규와 그의 영국 유학으로 후임이 된 기독교교회협의회(NCC) 교사위 간사 최혁배(뉴욕에서 변호사 개업 중), ‘기사연’ 간사 이미경(3선 의원, 국회문광위원장 역임), 빈민선교 운동가 박종열(KSCF 총무 역임,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공동대표), 기독교학생총연맹 간사 정상복(순례자교회 목사), <기독교사상> 여성기자 박영주(잠실교회 목사) 등과 여러 번 만났다. 한결같이 그들이 짜놓은 간담회, 좌담회, 강연 모임에 나와 ‘좋은 말’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는데, ‘좋은 말’이란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고 모임은 비공개였다. 그들의 주선으로 더러는 인권 상황에 관심을 갖고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변호사와 선교사를 만난 적도 있었으므로 그때 신문 표현대로 하면 나는 어김없는 ‘반체제 활동’ 중이다. 스스로 겁이 많은 사람으로 여기는데 그 서슬 퍼런 시절 어쩌다 개신교 쪽에 겁없는 사람으로 비쳤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 솔직하게 말해서 마음 편한 사람은 역시 해직 기자, 해직 교수, 그리고 <창작과 비평> 주변에 모이는 문인들이었다. 같은 먹물이니까. ‘창비’ 사무실은 <한국일보> 뒷골목, 지금은 헐렸지만 <연합통신> 입구에 있어서 심심하면 거길 들렀다. 해직 교수 백낙청은 계간지 외에 단행본 출판을 시작한 터라 편집과 경영 업무에 시달리는 바람에 술판은 되도록 피했다. ‘창비’ 말고 근방에 내가 자주 들르던 곳은 종로 1가에 무역회사(흥국통상)를 차린 ‘파격’ 채현국-‘호협’ 박윤배의 사무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 셋, 이계익(동아일보 해직, 교통부장관 역임), 이종구(조선일보 해직, 무역협회 상임이사 역임), 황명걸(동아일보 해직, 시인)의 딱한 사정을 잘 아는 터라 해직 기자라면 누굴 만나도 으레 밥과 술을 사주었다. ‘동아’ 해직 기자 양한수는 몇 해, ‘조선’ 해직 기자 문창석은 몇 달 그 무역회사에서 일도 했다. 청진동에는 ‘동아 투위’ 사무실과 ‘자유실천 문인 협의회’ 맹렬회원인 천승세(소설가)가 연 ‘일석기원’이 있어 저녁나절이면 자연스럽게 근방(수송동과 청진동 일대) 술집으로 ‘몰지각한 지식인’(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지식인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로 박정희가 붙인 표현)이 모이는 거였다. 거기서 새로 사귄 친구들은 건축가 조건영(한겨레신문 공덕동 사옥 설계자), 미술평론가 최민(시인, 예술종합학교 교수), 미술가 김용태(민예총 회장), 민속학자 박현수(영남대 교수), 미술가 김정헌(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미술사학자 유홍준(문화재청장 역임)인데 모두 나보다 열 살쯤 아래다. 인연이란 참으로 기묘한 것이어서 광주 사람 조건영이 아니었더라면 광주 출신의 중요한 반유신 언론인 둘, 즉 김태홍(기자협회 회장, 언협 2대 사무국장, 한겨레신문사 이사, 국회의원 역임) 과 박정삼(한국일보 노조 사무국장, 국민일보 사장, 국정원 차장 역임)을 훨씬 뒤에 알게 되어 데면데면한 관계로 그쳤을지 모른다. 술자리에서 걸직한 입담으로 좌중을 웃기는 김태홍에게 “입으로
![]() |
임재경/언론인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