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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1월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주회복 국민선언대회’에 참석한 천관우(점선 안) 전 동아일보 주필.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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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람들 10-2
내가 ‘서대문’에서 빨리 풀려나도록 애써준 채현국과 박윤배 앞에서 내색은 안 했을망정 같은 시기에 들어갔던 해직언론인들을 놔두고 혼자 나온 것을 후회할 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열 살 연장의 청암이 거기서 겨울을 나야 한다는 것이 몹시 안쓰러웠다. 범하(인권변호사 이돈명의 아호)를 찾아가 청암 이야기를 했더니, ‘김대중 내란음모’에 얽힌 사람들은 어차피 정치적으로 일괄처리될 터이니 너무 괘념하지 말라고 했다. 범하는 광주의 원로 변호사 홍남순(작고)이 ‘5·18 광주 폭동의 수괴’로 군법회의에 기소된 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며 속을 태웠다. 얼마 뒤 천관우(<동아일보> 주필 역임, 작고)의 불광동 집을 찾았다.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 내가 매해 연초 세배를 빼놓지 않은 언론계 선배. 서대문에서 나온 다음 들리는 소문은 전두환 일당이 그의 성가(聲價)를 자기들 편에 유리하도록 써먹으려 백방으로 공작을 했다는 것이며, 그 성과인지는 알 수 없으되 수백 명의 기자들이 내쫓기는 판국에 거꾸로 천관우는 <한국일보> 이사로 영입되어 기명 칼럼을 쓰고 있었다. 서대문에서 고생하는 청암 이야기가 끝난 뒤 그가 내게 한 말은 덧정이 정말 떨어지는 소리였다. “임형! ‘다방가’(茶房街)에서 무어라 떠들건 간에 적어도 향후 3년간 과거와 같은 행동은 용납 안 될 거요”라 하는 게 아닌가. 어안이 벙벙했다. 우선 ‘다방가’란 말이 귀에 거슬렸다. 반세기 전의 표현이거나 천관우의 조어인 모양인데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서는 야당 정치인과 반체제 인사를 경멸하는 뜻으로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고, ‘과거와 같은 행동’이란 두말할 나위 없이 거리시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식인 134인 선언’으로 구치소에 들어갔던 나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당신 역시 한자리 하려고 정치인들과 어울린 거 아냐’란 뉘앙스로 들렸다. 너무 억울했다. 한국의 양심을 대표했던 언론인 천관우가 그 날조된 ‘김대중 내란 음모와 과도내각 명단’을 믿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천관우의 시각은 그의 이해하기 힘든 처신에 얽힌 자기정당화라 하겠으나, ‘김대중 과도내각 명단’에 대하여 많은 오해와 빈정거림, 그리고 어이없는 ‘기대’를 나는 친지들로부터 들었다. 그 이야기는 뒤에 따로 쓰겠다. 광주항쟁 이후 한동안 뜸했던 개신교 진보파 쪽과의 관계는 휴면 끝에 81년 여름 복원되었다. 박형규 목사(민주화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앙가주망’ 기능을 전두환 정권하에서 최초로 시험한 모임에 나는 또다시 겁 없이 참석했던 거였다. ‘전국인권협의회’란 명칭의 왜관 소재 가톨릭 분도수도원 모임에는 박형규 외에 교계의 서남동(연세대 교수 역임, 작고), 이우정(한국기독교 여신도회장 역임, 작고), 윤숙영(‘동아투위’ 박종만의 부인, KNCC 인권위 간사 역임, 남북평화재단 이사), 그리고 출옥한 지 몇 달 안 되는 청암과 유인호(중앙대 교수 역임, 작고)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분도수도원 모임에서 나는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논리 전개와 표현에 조심하려고 노력했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입을 열면 자제하지 못하는 성미 때문에 과격했던 것 같다. 참석자들은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으며, 특히 유인호는 점심시간에 목사·신부들을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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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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