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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월 미국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오른 김대중이 워싱턴에서 비행기 탑승 직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대중 자서전-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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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람들 10-7
후광의 대통령 재임 중은 말할 나위 없고 그 이전의 적극적 정치활동 기간 나는 국제문제연구센터(CFIA)에서의 사사로운 인연은 일절 공개석상에서 발언하거나 글로 쓴 적이 없다. 크게는 불필요한 정파적 오해를 사지 않으려는 동기가 작용했고, 다른 쪽으로는 ‘하버드 동문수학’(백낙청의 표현)을 두고두고 우려 먹는 것이 속 보이는 짓 같아서였다. 성장 배경, 취향, 기질에서 후광은 나와 전혀 다른 타입이다. 근검면학, 허황한 낭만적 감정의 배격, 실사구시의 현실주의가 그의 장점이라면 나는 어려서부터 공상(검찰 조서나 기소장에는 ‘망상’으로 표기된다)을 즐겨 하며 허영에 가까운 지적 호기심에다 낭만적 감정에 도취하는 기질. 그의 옷차림은 그때나 이제나 검은색 정장에 흰 와이셔츠인데, 미국에 왔으면 콤비나 캐주얼, 그리고 셔츠도 화사한 원색을 입어도 좋으련만…. 후광은 측근의 점퍼 차림조차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보좌역을 지낸 최성일 박사(스미스앤호바트대학 교수 역임, 작고)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후광의 국제문제연구센터 연구원 사무실에 들를 때면 그는 대개는 편지지에 만년필로 무얼 쓰고 있었다. 한번은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가 물었더니 생면부지의 재미동포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라는 것. 격식을 갖추어야 할 편지가 아니라면 비서를 시켜서 써도 될 터인데, 정치적 지지자와 후원자들에게 들이는 그의 정성과 공은 상상을 초월한다. 또박또박 정자로 쓴 후광의 육필 편지를 받은 지지자는 틀림없이 그것을 ‘신표’(信標)처럼 평생 소중하게 간수할 것이다. 후광은 둘째 며느리가 한국에서 왔다며 간소한 피로연 형식의 저녁을 하자며 나를 워싱턴까지 초대한 적이 있다. 돈 들여 호텔에 갈 것 없이 한국식 아침밥도 먹을 겸 자기 집에 와서 자라는 거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후광의 거처는 크지 않아 손님용 방이 따로 없었던 까닭에 그는 안방으로 가고 나는 그가 사용하던 침대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객지에서 혼자 사는 나를 위해 보여준 성의는 감사할 일이나 결과적으로는 예의에 벗어난 과객 노릇을 한 셈이다. 아침 일찍 후광 거처로 출근한 당시 비서 정동채(<합동통신> 해직, <한겨레> 논설위원, 국회의원, 문화관광부 장관 역임)를 오래간만에 대면하여 한국 정세에 대한 소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재미 민주화운동가 조직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쪽 관련 인사들을 만난 적은 있다. 진작부터 잘 알던 문동환 목사, 한완상 교수, ‘민청협’ 회장 출신의 학생운동가 이신범(국회의원 역임)과 재미동포 가운데 열렬한 후광 지지자인 최기일(우스터대학 교수 역임, 작고), 차승만(브라운대학 물리학 교수 역임), 이재현(켄터키대학 교수, 작고), 이근팔(미주인권문제연구소장, 후광의 망명 중 비서실장 역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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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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