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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15 19:08 수정 : 2018.05.09 18:48

임재경/언론인

세상을 바꾼 사람들 11-3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의 인기 고정란이었던 ‘도전 인터뷰-쾌도난담’을 나는 꼭 찾아 읽곤 했다. 전세계에 명성을 드날린 이탈리아 여성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의 회견기록 <역사와 인터뷰하다>에서 느낀 것, 즉 “멋있는(도전적) 질문이 멋있는(내용이 풍부한) 답변을 유도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고자 한 때문이다. 그런데 한겨레21의 ‘도전 인터뷰’는 분량이 짧은 것이 큰 제약인데다 인터뷰 대상으로 나온 한국의 정치인, 고위 행정가, 연예-스프츠계 스타들이 유머감각과는 거리가 멀어 흥미를 잃고 말았다.

팔자 드센 나는 인터뷰 운이 없었다. 1990년 초가을 리비아 이슬람혁명 20돌 기념행사 초청을 받아 강철원(<한겨레> 기자, <와이티엔> 해설위원), 이봉수(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와 같이 트리폴리까지 날아가 닷새를 기다렸으나 카다피를 만나려던 기획은 불발로 그쳤다. 그 대신 귀국 비행기를 타기 2시간 전 리비아 제2인자 잘루두 소령과 30분 가량 만난 것이 고작인데, 인터뷰라 하기엔 참담한 실패작이었다.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한 기간에 내가 했던 인터뷰보다 더 많은 횟수의 인터뷰를 한겨레 창간 전후 몇 해 사이에 당했다. 우리말 번역이 아직 정착하지 않아, 영어로 하자면 인터뷰어(인터뷰하는 사람)의 대각에 선 인터뷰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외국 여성 기자들의 질문은 이따금 짜증이 날 정도로 날카로웠는데, <르 몽드>의 88년 당시 서울 주재기자 도미니크 바루슈(프랑스 방송 <앙텐2> 기자, 프리랜서)와 서독의 국영통신 <데페아>(DPA)의 여성 기자가 복장을 긁는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88년 말, 일본의 보수 성향 월간지로 300만부 넘는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문예춘추>의 자유기고가라는 40대 여성이 나를 인터뷰하겠다고 양평동 사옥으로 찾아왔다. 그는 영어가 서툰 편이어서 일본말 반, 영어 반으로 한 시간 가까이 문답을 나누더니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신문과 잡지에 이미 다 나온 것”이라며 다른 이야기를 해달라는 거였다. 하도 여러 번 인터뷰를 한 터라 ‘달달’ 외고 있는 정도여서 무엇을 더 듣고 싶은지 내 쪽에서 물어야 할 판이다.

팔라치라는 이탈리아 기자의 이름조차 못 들어본 ‘받아쓰기만 하는 글쟁이’가 확실한데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편집국으로 안내했다. 한겨레 여성 기자들이 분주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저만치에 김선주(<조선일보> 해직기자, 한겨레 논설주간 역임, 칼럼니스트)가 무엇인가 편집위원장과 열띤 대화를 하고 있었으며, 생활환경부의 김미경(<허스토리> 편집장, 뉴욕 한국문화원)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기사를 쓰고 있었다. 일본 방문객을 데리고 김미경 옆으로 가 뭐든 물어보라 했다. 다음은 20대 초반의 여성 오퍼레이터들이 일하는 조판실 쪽으로 갔다.

그는 여성 기자 수가 많은 것과 그들이 편집국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 특히 여성 기자가 대선배이자 부사장 앞에서 담배를 끄지 않은 것에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한국의 기존 신문사에는 여성 기자가 많아야 네댓인데 한겨레는 20명이 넘는다는 것, 다른 신문사에서는 일본 신문을 본떠 여성 기자를 ‘구사바나’(화초라는 뜻)로 여길 뿐 당당한 일손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 기자는 남녀 불문 모두 단일호봉제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 남성 기자가 담배를 피우면 여성 기자도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신나게 떠들어댔다.(이후 공덕동 새 사옥으로 옮기면서 실내흡연은 금지됐다) 그 일본 자유기고가는 고개를 두세 번 조아리며 ‘잘 알겠습니다’를 연발하는 거였다.

한겨레가 이 땅에 뿌리박힌 모순과 차별의 축소판이라 하였으니 한겨레에 성(젠더) 차별이 철폐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건 강변이다. 하지만 한겨레가 나오기 전까지 기존 신문들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인습적 성차별의 일각을 한겨레는 단숨에 깼다. 이를테면 신문사의 남녀 기자가 사내결혼을 하면 둘 중 하나, 대개는 여성 쪽이 회사를 떠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사규에 없는 불문율이고 설혹 사규에 있더라도 근로기준법 위반일 그런 기본권 제한 행위에 아무도 법적 대거리를 못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한겨레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기자 부부만 열 쌍이 훨씬 넘는다. 나만 해도 부사장으로서 조선희(한겨레 기자, <씨네21> 편집장 역임, 국립영상자료원 원장)와 박태웅(한겨레 기자, 열린사이버대학 부총장)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여성이 대선배인데다 연상이어서 당시 한겨레는 물론 언론계 안팎에서 큰 화제가 됐던 ‘사건’이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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