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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7.22 20:44 수정 : 2018.05.09 18:52

임재경 언론인

역사 현장을 답사보고 혹은 기록하려는 사람에게는 미리 관련 정보와 지식을 최대한 흡수해두는 것이 필수적이다. 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가 주최한 제5기 ‘독립정신 답사단’이 상해(상하이)-남경(난징)-항주(항저우)-장사(창사)-중경(충칭) 등 10여개 도시를 순방하는 중국여행길에 참가하기 앞서, 나는 10대의 애독서인 <백범일지>와 20대 초에 탐닉했던 앙드레 말로의 <인간 조건>을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시 읽었다. 또 김희곤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구>를 노트해가며 훑었다. 섭씨 35~38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에 배낭을 메고 버스와 열차로 8박9일의 빡빡한 일정을 강행하는 답사단의 대학생들이 <백범일지>는 말할 나위 없고, 정정화(임정 요인 김가진의 며느리)의 <장강일기>를 읽은 데 적잖이 놀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왜 하필 상해에 터를 잡았을까. 중국 손문(쑨원)의 ‘삼민주의’ 신해혁명과 공산당 운동의 초기 활동 근거지가 거기였다는 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서구 침략의 선단 지역인 상해가 동시에 반외세 운동과 기존 정치·사회 체제를 타파하려는 좌파 운동의 무대가 되었던 것은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이한 감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일제 강점하의 조국 땅에 더 가까운 곳, 즉 간도와 연해주를 마다하고 상해를 택한 데서 장기적 안목의 광복투쟁과 주권재민의 꿈을 실현하려는 선지자의 면모가 엿보인다. 이를테면 상해 임시정부의 헌법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한 것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군주제를 청산한 것이다. 답사 기간에 맞은 제헌절(7월17일)에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정신을 누가 먼저 분명하게 문서화했는지를 재확인한 셈이다. 우리보다 근 40년 앞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제에 매달리는 것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중년 이상의 한국 사람 대부분은 상해 하면 곧 윤봉길 의사를 떠올린다. 1932년 4월 일본 군대가 상해를 점령한 뒤 전승을 자축하는 행사장(훙커우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 육해군 대장 둘을 폭살시키는 데 성공한 때문이다. 중국군 몇 개 사단이 저지하지 못한 일본 침략군, 그 수괴들을 단방의 테러로 응징한 것은 일본과 중국 두 나라는 물론이고 전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임시정부의 궤멸 공작에, 중국 국민당 정부는 임정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에 나서게 된다. 강대국에 유린당한 식민지의 인민들이 주권을 되찾는 방법으로는 흔히 비폭력 무저항주의, 유격 군사투쟁, 테러의 세 가지가 꼽힌다.

‘루쉰 공원’으로 개칭된 테러 현장에 윤봉길 의사의 장거를 기리기 위해 상해시 정부는 의사의 아호 매헌(梅軒)을 따 자그마한 기념정자를 세웠다. 윤 의사 의혈투쟁이 있기 5년 전쯤인 1927년 반식민지 반봉건 상태의 상해에서는 좌우파 사이의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벌어진 것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그런 가운데 장개석(장제스)계의 극우파 세력이 공산당원 및 그 동조 지식인을 대량 도살한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군사조직의 무차별 유혈폭력에 테러로 대응하는 것이 때로는 유효하지만 많은 경우 처절한 비극으로 끝난다.

<인간 조건>에 나오는 주인공 중 하나인 첸은 상해에서 장개석의 전용 세단에 수류탄을 들고 몸을 던졌다. 차는 대파됐으나 거기에 장은 타지 않았고 첸은 중상을 입었다. 그에게 다가오는 장의 경호군인들을 향하여 첸은 권총을 뽑으려 했으나 그의 하반신은 이미 절단된 후였다. “권총, 바지 주머니, 허벅지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소설의 한 대목이 상해에 머무는 한나절 동안 나를 괴롭혔다.

임재경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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