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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들어 ‘개헌-호헌 논쟁’ 속에 경쟁적인 서명운동을 벌이던 재야와 ‘양김씨’의 야당은 5월3일 ‘신민당 개헌추진대회’가 괴한들을 동원한 경찰의 폭력저지로 번지면서 분열의 길로 들어섰다. 사진은 ‘5·3 인천사태’로 불린 이날 대회 장소인 인천 시민회관 일대에서 재야·학생·노동·농민·청년운동 단체들이 저마다 주장을 담은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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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93)
■ 양김씨의 야당과 재야 민주화운동 분열 1986년 5월3일 인천에서 직선제 개헌운동 집회가 열렸다. 나도 민통련 회원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전두환 정권은 재야·노동·청년·학생운동이 총집결한 이날 인천 주안 4거리 집회를 용공·폭력 집회로 몰아 민주화운동권에 궤멸적 타격을 가했다. 이 ‘인천집회’에 대한 5공화국 정권의 대대적 탄압을 당시 언론들은 ‘5·3 인천사태’라고 불렀다. 85년 ‘2·12 총선’에서 승리한 김대중·김영삼 ‘양김씨’는 이민우 신민당 총재를 앞세워 그해 말 ‘직선제 개헌 1000만명 서명운동’을 선언했다. 재야 민주화운동의 통합을 추진해온 민통련도 앞서 9월 개편대회 뒤 연말을 맞아 ‘민주헌법 쟁취위원회’라는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2년도 채 안 남은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계속 ‘체육관 선거’로 맞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은 86년 1월16일 새해 국정연설에서 “지금 헌정제도를 변경하는 것은 난국을 초래한다”, “현행 헌법으로 87년 대선을 치러 대통령 단임 전통을 먼저 확립한 다음에 개헌 문제는 ‘88 서울올림픽’ 이후 논의하자”고 응수했다. 이는 87년 자신이 직접 군인 중에서 차출해 허수아비 후임 대통령을 앉혀 놓고 계속 권한을 유지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실제로 전두환은 세칭 ‘상왕’ 자리를 만들기 위해 재벌들의 돈을 끌어모아 ‘일해재단’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86년 초 한국의 정치지형은 ‘개헌이냐, 호헌이냐’ 또는 ‘87년 이전 개헌이냐, 88년 이후 개헌 논의냐’를 둘러싸고 대치 국면에 들어갔다. 재야운동권과 야당 정치인들 사이에 개헌의 내용과 추진 방법을 둘러싼 간극도 벌어지고 있었다. 야당 개헌운동의 초점은 ‘대통령 직선제’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 근저에는 “대통령 직선제만 도입되면 자신들이 집권하는 민간정부가 들어서게 될 터이고, 그러면 한국의 군부정치는 끝장나게 되므로 나라의 민주화가 저절로 궤도에 오르게 된다”는 ‘양김씨’의 정치관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민통련 등 재야세력들은, 개정 헌법에 “인간의 존엄과 민중생존권, 남북 평화와 분단 극복 등의 가치가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새 헌법에는 집회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노동자들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이 더 명백히 보장되어야 할 뿐 아니라 반민주적, 반민족적, 반민중적 권력의 폭압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저항권이 헌법적 권리로 분명히 명시되어야 하며,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자유로운 통일 논의 권리도 보장돼야 할 것이었다. ‘양김씨’는 전두환 정권을 향해 “더이상 망설이지 말고 개헌 협상에 나서라”고 촉구하고 나선 데 반해, 학생·청년·재야 운동권은 “전두환은 하루빨리 퇴진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정권을 잡으려고 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과 협상하려는 개헌운동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재야운동의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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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7월3일 서울대생 권인숙 학생에 의해 폭로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계기로 ‘5·3 인천사태’ 이후 갈라질 위기에 빠졌던 재야와 야당 정치권은 다시 뭉쳤다. 87년 6월항쟁으로 가석방된 뒤 9월14일 ‘석방 환영 및 86 여성운동 인물 선정’ 기념식에서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권인숙씨,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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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5·3 인천사태로 파탄
정체불명 괴한에 경찰 강경진압
재야는 백화제방식 주장 갈라져 분열 획책하던 전두환 정권
인천사태 배후로 ‘민통련’ 지목
문익환·백기완 등 줄줄이 구속
난 민통련 사무처장 맡게 돼 부천서 성고문 사건 계기로
재야는 다시 ‘연대의 길’로
“성까지 혁명도구로 이용” 역공
권력의 뻔뻔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편 이날 민통련과 가맹단체들, ‘서노련’ ‘인노련’ 등 노동운동, 민청련, 학생운동권에서는 같은 장소에서 따로따로 거리집회를 주최하면서 신민당의 타협주의를 비판하고, 저마다 ‘개헌’에 대한 주장을 선전하는 성명서·깃발·구호들을 백화제방식으로 내걸었다. 경찰은 한동안 어수선한 상황을 방치하더니 오후 5시부터 강제해산에 들어갔고, 5만을 헤아리는 시위대는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러자 주안 4거리에는 수백개의 깃발, 수십개의 펼침막, 갖가지 유인물들만 잔해가 되어 남아 있었다.(박우섭, ‘5·3 인천사태-민통련을 중심으로’, <6월항쟁을 기록하다>(제2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경찰은 그날 129명을 연행해 구속한 뒤, 6월2일에는 45명에게 특별수배령을 내렸는데, 그 가운데 민통련 간부가 37명이나 되었고, 서노련도 집중적 탄압을 받았다. 한편으로 전두환은 신민당에 대해 “국회에서 개헌 논의를 하자”고 회유작전을 폈다. 이른바 ‘분할지배(디바이드 앤 룰) 작전’으로 재야와 야당 사이를 이간질한 것이다. 신민당은 ‘5·3’ 이후 대중적 동력이 떨어진 것을 보고, 전두환의 공작인 줄 알면서도 5월30일 ‘국회 헌법 개정 특별위원회’ 구성에 합의해 국회로 돌아가고 말았다. ■ 국민에 대한 폭력기관으로 회귀한 국가 ‘5·3 인천사태’는 국가가 다시 국민에 대한 폭력기관으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우선 인천집회를 국가전복을 꾀한 폭동이라 규정하면서, 민통련을 배후 중의 배후로 몰았다. ‘5·3 인천집회’에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민통련이 서로 다른 주장을 했는데도 총배후를 민통련에 뒤집어씌우는 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못했다. 검찰은 중간수사결과 발표에서 “급진좌경 활동과 격렬한 폭력소요를 자행해온 ‘민민투’ 학생운동과, 체제 전복 기도 등의 범죄 전력이 있는 장기표·정동년 등이 핵심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민통련 및 그 가맹단체 소속원 등이 인천 소요를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며 “이번 폭력 소요사태에서 인천을 해방구로, 해방인천 만세, 미·일 외세 몰아내고 민중정권 수립하자는 등 북괴의 상투적 대남 선전, 선동과 현저히 유사한 내용의 구호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인천집회의 배후인 민통련은 “반국가단체”라는 것이었다. 전두환이 이처럼 자신만만했던 배경에는 야당과 재야가 서로 분열하고 반목한 데도 한 원인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천집회’ 당시 학생운동의 한 그룹, ‘전국 반미 반파쇼 민족민주투쟁 학생연합’(민민학련)은 “제헌의회 소집”을 외쳤고, 또다른 학생운동 그룹인 ‘반미 자주화 투쟁 민족민주투쟁 학생연합’에서는 “미제 축출”, “반전 반핵”을 외쳤다. ‘서노련’과 ‘인노련’ 등 노동단체들은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요구했다. 가맹단체인 민청련조차 민통련을 “야당과 타협하는 기회주의 작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나는 자유로운 비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천집회’에서 재야 단체들의 ‘중구난방’은 때와 장소를 잘못 고른 커다란 실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인천집회 같은 사태가 일어나서는 결코 안 되었다. 서로 의견이 조율되지 않는다면, 최소한 모든 참가단체의 대표자가 회의를 해서 연합집회를 열고, 각자 차례대로 단상에 올라가 주장함으로써 학생·시민 모두를 선전하고 설득하는 것이 정답이다. 나는, 한 사회에서 독재-민주 세력이 대립하고 있을 때 특히 민주세력은 연대를 하지 않고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믿는다. 또 연대를 할 때는 ‘논이구동’(論異求同)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생각이 다를 때는 토론을 해서 뜻이 합쳐진 부분만 행동을 같이하기로 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끝내 생각을 달리하는 부분은, 그대로 내버려둘 일이었다. ‘5·3 인천사태’ 이후 민통련은 고 문익환 의장, 고 강희남 대의원총회 의장, 백기완 부의장, 정동익 감사, 임채정 상임위원장, 김종철 대변인, 이부영 사무처장, 조춘구 사무차장, 장기표 정책연구실장, 장영달 총무국장, 박계동 홍보실 차장 등이 구속·수배되는 바람에 쑥대밭이 되었다. 그해 6월26일 구속된 이창복 부의장은 6월 초 나를 불러 수배된 이부영 대신에 민통련의 사무처장 대행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사양했다. 그 하나는 원체 약골이었던 탓에 ‘언협’ 사무국장 1년 동안 해친 건강부터 회복해야 하는 사정, 또 하나는 활동자금을 조달해낼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좋다. 간판만 지켜달라”라는 그의 부탁을 나는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6월 말 장충동 민통련 사무실로 출근해보니 상층부로는 고 계훈제 부의장, 이해찬 정책위원회 차장, 박우섭 총무부 차장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일당백의 간사들, 정선순·이명식·임병주·이달원·이윤숙·오경렬·변인식 등이 남아 민통련을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나는 시인 김정환을 대변인 대행으로, 고 김도연을 편집실장 대행으로, 박우섭을 총무부장으로, 간사 정선순을 총무부 차장으로 하는 최소한의 진용을 새로 꾸렸다. 또 고난의 86년 여름, 민통련의 건재함을 안팎에 알리고자 <민중의 소리>를 꾸준히 발간하는 한편 지역운동협의회 간사 이명식을 통해 ‘민통련 지역운동가맹단체협의회’(지운협) 활동가들과 함께 ‘다가올 전두환 정권과의 전면적 대결에서 지역 대중들과 민통련이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분석하는 과제를 맡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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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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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회고록 ‘길을 찾아서’는 그동안 사람면에 매주 5회씩 날마다 연재했으나 오늘부터 주 1회 매주 화요일 전면에 걸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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