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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초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민주화운동 진영에 각성과 연대의 촉매제로 작용해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의 결성을 이루었고 마침내 ‘6·10 항쟁’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대격변기였다. 사진은 그해 5월27일 서울 연지동 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제1차 전국회의’에서 단상에 오른 주요 임원들이 국민의례를 하는 모습. 왼쪽부터 양순직 상임공동대표, 지선 공동대표, 문익환·김영삼·김대중 고문, 계훈제 상임공동대표, 이돈명 공동대표, 김명윤 상임공동대표 등이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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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95)
■ 전두환 “군사정권 20년 더 집권할 계획 세워라”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1986년과 87년처럼 극과 극을 달린 해도 없을 터이다. 86년은 공개 민주화운동이 ‘존폐의 위기에 처한 시기’였는데, 불과 1년 뒤인 87년 온 국민이 함께한 ‘6월항쟁’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전두환은 “군사정권이 20년 더 집권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라”고 국가안전기획부에 지시하는 한편, 학생운동과 민통련, 민통련 가맹단체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국민들과 차단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85년 8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시국대책위원회가 ‘<한국방송>(KBS) 시청료 거부운동 기독교 범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한 것은 민주화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앞서 가장 먼저 조직적인 케이비에스 시청료 거부를 선언하고 나선 것은 84년 4월 전북 완주의 가톨릭농민회와 천주교회였다. 86년 2월에는 1만여 기독교회와 14개 교구의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청년·여성 등 사회운동단체들이 ‘케이비에스 시청료 거부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해 한 차원 더 높은 연대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 대학생 1287명 무더기 구속과 민통련 폐쇄 86년 10월28일 전국 26개 대학 학생들이 건국대에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결성식’을 열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이날 모인 2000여명의 학생들을 “전쟁터의 적과 같이” 대했다. 학교를 봉쇄하는 바람에 건물에 갇힌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농성을 벌였다. 이른바 ‘건국대 사태’였다. 나흘째 굶주림과 추위로 학생들이 하나둘 탈진하기 시작한 10월31일 정권은 아침부터 헬리콥터로 소이탄을 쏘는 한편 8000여명의 전투경찰을 동원해 최루탄을 쏘면서 농성 건물들로 쳐들어가 1525명의 학생을 연행하고 이 가운데 1287명을 구속시켰다. 언론에서는 당시 경찰의 ‘전투작전’을 “용공 좌익 학생 소탕작전”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에 민통련은 11월3일 “군부독재의 건국대 연합집회에 대한 폭력적 탄압을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경찰은 바로 민통련 사무실이 들어 있는 장충동 분도회관을 포위했다. 나는 사무국장으로서, 고 계훈제 부의장을 모시고 민통련 간사들, 가맹단체 지원자들 30여명과 함께 민통련 사무실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 닷새째인 11월7일 전투경찰은 산소용접기와 쇠망치를 들고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고 김인한 동아투위 위원장, 박용수 보도실장 그리고 나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어가고, 김정환 대변인, 이해찬 정책연구실 차장, 김승균·이재오·김도연·최장학·고광진 회원 등을 수배했다. 또 이날 민통련과 민통련 가맹단체들인 한국노협, 서노련, 청계피복노조, 인노련, 민통련 서울·강원·경북·경남지부 등에는 해산명령이 내려졌다. 내가 남영동을 거쳐 검찰에 넘어갔을 때, 담당 검사는 “우리는 지난 1년간 민주화운동권을 죄다 평정했다. 건대 사태로 학생운동 주동자들이 모두 일망타진되었다. 민통련도 이번에 사무실까지 폐쇄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종교인들이 좀 남아 있긴 하나, 그들이 운동에 앞장서지는 못한다”고 자신만만했다. 나는 86년 12월13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그사이 분도회관 사무실은 폐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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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만여 기독교회와 14개 교구의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결성한 ‘케이비에스(KBS) 시청료 거부 범국민운동본부’는 민주화운동의 연대 방식을 한 차원 높였다. 사진은 87년 사제단이 직선제 개헌 단식기도를 하고 있던 광주 가톨릭센터 건물에 내걸린 펼침막.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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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안기부에 계획 수립 지시
학생운동·민통련 철저 감시 26개 대학 건국대서 애학투 결성
전경 8천명 동원 강제연행
1287명 구속…‘건국대 사태’ 불러
민통련 농성중 난 남영동 끌려가 군사정권 수배자 강압 검거 발단
박종철 고문치사 비극 초래
‘고문공대위’에 들어가 전략 기획 민통련, 전두환의 ‘호헌선언’ 맞서
재야·종교계·학생운동과 연대
2191명 ‘민주헌법 쟁취 국본’ 첫 출범 ■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전두환 정권은 수배자들을 검거하고자 과속 엔진을 밟았다. 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터진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무리한 수배자 몰이가 빚은 비극의 절정이었다. 전두환과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 등은 ‘고문살인 교사범’들이었다.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박종철군의 죽음 사실이 알려지자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등이 당장 항의농성에 돌입했고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들은 교내에서 장례식 집회를 열었다. 1월17일에는 ‘고문공대위'가 다시 소집됐다. 고문공대위 실행위원들은 당면 민주화운동을 고문 추방에 집중시키기로 했다. 실행위원으로는 민통련에서 나와 이해찬, 개신교에서 고 김동완·고 허병섭·인명진·이해학 목사와 황인성 간사, 천주교에서 이길재·이명준, 민가협에서 인재근·유시춘, 여성운동계에서 이미경, 신민당과 민추협에서 김도현·김병오·이규택·한영애 등이 활동했다. 당시 민통련의 이부영·김종철은 구속된 상태였고, 권호경 목사는 홍콩의 아시아교회협의회 본부에 나가 있었다. 우리는 고문추방운동의 구호를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군사독재 청산 없이 고문 청산 없다”로 정했다. 고문추방운동 장기전략 기획은 네 사람, 민통련의 나, 민추협의 김도현, 가톨릭의 이명준, 개신교의 황인성이 맡기로 했다. 네 사람은 합숙 끝에 다음과 같은 행동방침을 제안했다. “국민 모두가 상주다. 모든 민주화운동 사무실과 야당 정치권은 사무실에 빈소를 차린다”, “1월20~26일을 박종철군 분향 기간으로 정한다”,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를 결성한다”, “모든 교회·성당·사찰은 고 박종철군을 위한 기도회를 연다”, “2월7일 범국민 추도회를 개최한다”, “박종철군 사십구재 때인 3월3일 ‘고문 추방 전국 평화대행진’을 한다” 등이었다.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으로 무려 7만2674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을 보면, 국민적 슬픔과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2·17 국민추도회’와 ‘3·3 평화대행진’에는 서울·부산·광주·대구·대전·인천·전주·청주·마산·수원·춘천·안동·원주·무안 등 전국 곳곳에서 시민들이 참여했다. 이 사건은 학생 중심 민주화운동에서 학생과 시민 연합 민주화운동으로 탈바꿈하는 대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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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필자는 김도현·이명준·황인성 등과 함께 ‘고문추방운동 장기 전략 기획’을 맡아 진상규명 투쟁을 주도했다. 사진은 2월7일 서울 명동성당 입구에서 고문공대위 주도로 열린 ‘박종철군 범국민 추도회’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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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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