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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에도 시민을 뉴스의 주어로 삼기를 거부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위기와 언론자유의 후퇴를 스스로 불러왔다고 필자는 지적한다. 사진은 지난 5월 한국방송(KBS)노동조합과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방송본부가 ‘길환영 사장 퇴진과 박근혜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는 첫 동시파업에 돌입하면서 시청자와 국민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 탁기형 <한겨레 21>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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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98)
■ 위기의 한국사회 민주주의 지난 6월10일 ‘6월항쟁’ 27돌을 맞은 당시의 항쟁 주역들은 정부 주최의 공식 기념식 참석을 거부하고 별도의 기념식과 거리행진을 벌였다. ‘6월항쟁계승사업회’를 중심으로 성공회대성당에서 연 ‘민간 기념식’에서 500여명의 참가자 일동은 “다시, 민주·평화·복지를 위한 시민항쟁의 봉홧불을 올리자”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자 일동은 박근혜 정권이 전교조 등록 무효화, 통합진보당 해산 기도, 한국사 교과서 입맛대로 맞추기와 수구 기득권층의 친일·독재 행적 삭제, 거듭되는 파당적인 소통부재 인사정책 등을 지적했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노동 유연화, 기간사업의 민영화, 규제완화 정책 등을 비판하고,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손배소나 업무방해 등 반민주적이고 야만적인 악법으로 탄압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규탄했다. 무엇보다 ‘6월항쟁’의 주역들은 수십년간에 걸친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물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자리마저 박 대통령의 후보 시절 지지자를 지명함으로써 사유화하려는 데 대해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는 ‘제왕 주권’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에서 비롯되었다. 17~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민들이 “왕의 전쟁, 왕족의 사치를 위한 중과세를 감당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 내전이 일어났고, 절대왕정은 무너졌다. 이 시민혁명의 과정에서 ‘자유론’이 탄생했다. 특히 1789년 프랑스혁명은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권리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인쇄할 수 있어야 한다”(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1조)고 선언하고, 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등을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인권’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혁명은 또한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제3조)고 하여, “왕권신수설”을 거부하고, “국민주권론”을 채택했다. 언론의 자유가 시민 민주주의와 쌍생아인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다. ■ 국민들 목소리는 어디로 사라졌나 저널리즘은 ‘육하원칙, 즉 누가 언제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가’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육하원칙에서 ‘누가’라는 주인공을 그릇 선택하면 ‘언론의 자유’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보도의 주인공이 권력자나 관료냐, 아니면 국민이냐가 권위주의 사회와 시민 민주주의 사회의 갈림길이다. 이러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언론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6월항쟁’ 이후에도 시민을 뉴스의 주인공으로 삼기를 거부해왔다. 일제강점기에 언론은 “일본 천황이~”, “조선총독부는~” 식으로 뉴스를 시작해 늘 주인공은 식민 지배자들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 뉴스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은”, “정부 당국자는”, “검찰은”, “경찰은”, “집권 여당은”…, 독재자와 그 하수인인 관료들이 주어였다. 그렇다면 87년 이후 뉴스의 주어가 바뀐 적이 있었던가? 내 기억으로는 없다. 아니 오히려 재벌기업의 목소리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6월항쟁’ 이후 우리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 줄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요즈음에도 유권자들은 고작 선거 때나 잠깐 주권자 대접을 받고 있다. 선거가 끝나면 정당과 정치인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약속을 까먹고 이해관계자들하고만 어울린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는 결코 주권자가 되지 못하고, 관료 독재와 천민 자본가의 노복이 된다. 그리고 언론은 늘 변함없는 정경유착의 충실한 동맹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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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10일 민관이 따로 연 ‘6·10 민주항쟁’ 27돌 기념식은 박근혜 정부 들어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사진은 뉴라이트 성향 박상증 목사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취임을 반대하는 ‘이사장 불법임명 거부 국민대책위’가 농성 100일째인 지난달 27일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 주관 6·10 항쟁 기념식’ 불참을 선언하고 있는 모습.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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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마저
박근혜 지지자로 사유화 ‘절망’ 일제 해방 뒤 되찾은 ‘국민주권’
‘4·19’ ‘6·10’ 거치고도 허울만
권력은 선거 때만 주권자 대접
언론은 한번도 ‘시민은…’ 주어 안써 ‘청영방송 해바라기’ 길환영 몰아낸
KBS 사태 언론자유 중요성 보여줘
국민주권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 핵심은 ‘국민주권’운동이다 한민족의 근현대사를 잠시 되돌아보자. 우리는 구한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주자학의 ‘민본주의’를 내세운 조선왕조는 실제로는 관료독재 사회였다. 관리들과 아전들, 지방 호족들은 착취를 일삼았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헐벗었다. 박석무는 <다산 정약용 평전>에서 1797년의 ‘이계심 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계심은 곡산 백성이다. 아전이 농간을 부려 200냥 세금을 900냥이나 거두자, 이계심이 백성 1000여명을 인솔하고 관청에 들어와 항의했다. 아전과 관노비들이 몽둥이로 쫓아내자 달아났다.” “다산이 곡산부사로 부임할 때, 정승 김이소 이하 여러 대신들이 주동자 몇 놈을 죽이라고 권했다.” “다산이 곡산 땅에 이르자 이계심이 자수했다. 이계심은 백성들이 괴로워하는 10여 조목을 기록해 올려 바쳤다.” “다산은 이렇게 판결했다. 피고인 이계심은 무죄다.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을 얻기는 어려운 일이다.” 정약용 같은 목민관을 만나는 행운을 가졌던 이계심은 목숨을 건졌지만,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던 ‘수십만의 이계심’은 개혁 대신에 외세를 끌어들인 조선왕조로 하여 목숨을 잃거나 야반도주했다. 당시 조정에는 정약용 같은 목민관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굶주린 백성들의 일부는 하와이로, 멕시코로, 만주로, 시베리아로 흘러갔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그곳에서도 천대받았다. 시베리아 이민자 20여만명은 스탈린 시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는 신세가 되어 사막에 내버려지기도 했다. 조선조는 끝내 나라를 잃었고 한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노예가 되어 100만명 이상이 일본 군수공장으로, 사할린으로 징용당했고, 무수한 학생들이 징집되었으며 처녀들은 일본 군인들의 성적 노예로 강제로 끌려갔다. 조선 땅에 남은 사람들은 ‘공출이다, 부역이다’ 하여 일제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병참 노예가 되었다.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우리 한민족은 남북 분단의 비극, 한국동란의 비극을 겪어야 했고, 400만명이 희생됐다. 이 분단과 전쟁의 한민족 현대사에서 유일하게 건진 것이 있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며 ‘국민주권’을 국가이념의 기본으로 삼은 것이다. 6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사는 헌법 조문으로만 존재하던 ‘국민주권 사상’을 일상 속에 뿌리내리기 위한 ‘시민행동’이었다 할 수 있다. 이승만 독재를 타도한 60년 ‘4월혁명’은 최초의 국민주권운동이었다. 26년 동안의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 끝에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 손으로”라는 구호를 앞세워 대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킨 87년의 ‘6월항쟁’은 제2차 국민주권운동이었다. 그러나 ‘6월항쟁’은 ‘제왕주권’은 물리친 것 같았으나 ‘국민주권’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했다. 민주주의 사회는 원래 다양한 집단의 다양한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상과 이데올로기, 학문, 종교의 다양성을 혼란과 무질서, 정쟁으로 몰아붙이는 사회에서는 결코 시민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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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반쪽으로 열린 정부 주관 ‘6·10 기념식’장면.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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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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