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6 15:58
수정 : 2018.05.16 15:58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9년 11월 7일 한겨레신문 5면 ‘아침햇발’
장윤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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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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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입대한 우리 집 아이를 처음으로 면회 가던 날은 온 집안이 신새벽부터 떠들썩했다. 집사람은 아들이 좋아하는 김밥을 싸고 매운탕감을 준비하느라 분주했고 두 딸은 따로 더운 밥을 지어 보온밥통에 담고 찬합을 챙기는 등 신바람을 냈다. 과일과 음료수, 버너와 가스통까지 그들먹한 채비가 영락없이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와 큰딸은 손아래 동서가 몰고 온 차를 타고 강원도를 향해 떠났다. 때마침 늦가을이라 도로변의 코스모스에 먼 산의 단풍까지 겹쳐 계절의 정취가 물씬 했다. ROTC 출신인 동서는 집사람과 딸아이의 '사기'를 진작시켜주기 위해 일부러 구했을 법한 군가 모음 카세트 테이프를 틀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군가를 귓전으로 들으며 나도 모르게 6·25가 나던 그해 여름을 떠올렸다. 큰형님과 둘째 형님이 한꺼번에 군에 가게 되었다. 누나와 나 둘만 덜렁 남게 되자 어머님은 기도하는 심경으로 말씀하셨다.
“막둥이 너만은 다시 군대에 가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세월은 흘러 61년 가을에 나도 공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입대 인사를 하러 고향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던 날 아침 어머님은 한숨을 쉬시며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막둥이 너만은 군대에 안 가는 세상이 오기를 바랐는데….”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어머님은 고인이 되셨고 어머님의 손자인 우리 집 아이가 군대에 가 있게 된 것이다. '자식들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바라던 어머님의 간절한 염원을 이뤄드리지 못한 모든 책임이 마치 나한테 있는 것 같아서 괜히 죄송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경기도를 지나 강원도에 접어들면서부터 군용차량들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굽이굽이 소양강을 끼고 돌 무렵에는 부쩍 늘어났다. '운전교육'이라고 쓴 트럭들이 줄지어 달려갔고 트럭에는 '작대기' 하나짜리 사병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의 검게 탄 얼굴 하나하나를 눈여겨 보던 집사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언제 2년 6개월이 지나가지?”
동서가 그 말을 받았다.
“2년 6개월이요? 그거 곧 지나갑니다. 군대에서 하는 말이 있죠. 거꾸로 매달려 있어도 '국방부의 시계'는 간다고요.”
국방부의 시계라는 말에 촉발이라도 받은 듯 나는 '한반도의 시계'를 생각했다. 6·25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 한반도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변한 것이 없다. 데탕트가 어떻고, 신데탕트가 어떻고 떠들어대지만 '한반도의 시계'는 딱 멈춰 있거나 너무나 더디게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공연히 팔목시계를 굽어보고는 태엽 감는 시늉을 했다.
신병교육대는 '강원도 산골'이라는 말을 실감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정확히 그런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 집 아이가 '군사우편'에서 묘사했듯 손바닥만 한 하늘을 이고 있었다. 신병교육 수료식을 참관하고 그리운 아들 손자를 면회하려고 온 수백 명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들이 본부석 좌우에 마련된 스탠드를 가득 메웠다.
연병장에는 벽돌장들이 대오도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식전행사로 격파 시범이 있는 것 같았다. 군악이 울리자 군복바지에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신병들이 우렁차게 구호를 외치며 구보로 등장했다. 스탠드에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신병들은 절도있는 동작으로 순식간에 '정위치'했다. 스탠드의 부모들은 자신의 피붙이를 찾아 눈을 번득였다. 다행히도 아들은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었다. 태권도복을 입은 지휘자의 구령에 따라 벽돌 격파가 시작되었다. 나는 우리 집 아이가 벽돌 격파에 실패하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였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탠드에서 열광적인 박수가 일어났다.
신병들이 퇴장했다가 군복으로 갈아입고 집총을 하고 다시 도열하자 수료식이 시작되었다. 모범병사에 대한 특별휴가 포상이 진행될 때였다. 군악대가 <우리의 소원은>을 연주하자 곁에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것이었다. 눈물은 전염되는 것인가? 집사람도 울고 큰딸도 울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나는 시큰거리는 콧등을 제압하기 위해 담배를 피워 물다가 소스라치게 각성했다. '한반도의 시계'라니 무슨 한유한 소린가? 그건 사회과학적 인식을 들먹이며 민족분단을 마치 '남의 일'처럼 객관화시키는 자들이 뇌까리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멈춰 있거나 너무도 더디게 가는 시계는 한반도의 시계가 아니라 '어머니의 시계'인 것이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놓고 눈물짓는 어머니들이 어찌 남녘땅에만 있겠는가? 북녘땅에도 그런 어머니들이 무수히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멈춰 있거나 너무나 더디게 가는 시계는 정확히 말해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어머니들의 시계'인 것이다.
앞으로 우리 집 며느리가, 그리고 같은 또래의 북녘땅 어느 집 며느리가 자식을 군대에 보내놓고 눈물짓는 일이 없게 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한반도 어머니들의 시계'에 태엽을 감는 작업이다. '남북교류'라고 해도 좋고 '긴장완화'라고 해도 좋고 '평화 만들기'라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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