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6 16:15
수정 : 2018.05.1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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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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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9년 11월 21일 한겨레신문 5면 ‘아침햇발’
장윤환 논설위원
이른바 '시국사범' 또는 '공안사범'에 대한 재판을 한두 번 방청해본 사람이라면 이 땅에 두 가지의 법정이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실정법에 근거한 '현실의 법정'이며 또 하나는 '자연법' 혹은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신을 기초로 한 '역사의 법정'이다.
선고 공판의 형식요건을 성립시키기 위해 문익환 목사와 유원호 씨가 '얼굴만 비치고 퇴장한' 법정이나, 출정을 거부할까봐 교도관들에 의해 신새벽에 잠옷 바람으로 끌려 나온 임수경 씨가 서야 했던 법정이 바로 '현실의 법정'이다. '현실의 법정'은 제도로서 아주 위력적이다. 공판 도중 방청석에서 항의를 하거나 '소란'을 피울 경우 법정모독죄로 구속되거나 감치명령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는 74년 유신독재 때의 군사법정에서 '민청학련 사건'의 피고들을 변론하던 어느 변호사가 법정 구속된 사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이렇게 막강한 위력을 지닌 '현실의 법정'도 '역사의 법정'을 확신하는 피고인들에게 사형이나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할 수는 있으나 그들의 '확신'을 변화시키는 데는 속수무책이다.
“역사는 언젠가는 오늘의 재판을 다시 심판하게 될 것이다.”
“본인은 역사적 진실만을 주장할 것이다. 우리에게 법의 심판은 무의미하며, 오직 역사의 심판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민중과 역사의 심판을 받을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80년대 내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던 공안사건의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한 진술들이다. 이런 종류의 공판에서는 대다수 국민의 염원과 정서에 배치되는 실정법의 '비실정성'을 조목조목 들어가며 피고를 변론하는 변호인들의 노력이 안타깝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하다. 재판 결과를 놓고 보더라도 이런 공판에서는 재판부의 판결문이 검찰의 공소장과 대동소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법정'을 믿는 피고인들은 '현실의 법정'이 재판이란 절차를 밟기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더욱더 '현실의 법정'을 무시하거나 '초월'해 버린다.
이런 실정에서 우리는 두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의 법정'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리고 '현실의 법정'과 '역사의 법정'이 언제까지 따로따로 존재해야 하는가? 개인적인 느낌을 말한다면, 우리의 경우 '역사의 법정'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정기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을 얘기할 때 누구나 거론하는 친일파 문제만 보자. 오늘날 항일독립투사들이 '관념적'으로는 숭앙받고 있으며 친일반민족분자들 또한 '관념적'으로 매도당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실상은 어떤가? 친일파와 그 자손들은 미군정과 단독정부 수립 이후 오늘날까지 권력과 부귀영화를 세습적으로 확대재생산하고 있으나 독립투사의 유족들은 돈 없고 못 배운 탓으로 사회의 밑바닥 계층으로 전락해 있다. 사실이 이런데 누가 '역사'를 두려워하겠는가? 오늘날 우리 민족이 분단과 독재에 신음하고 있는 것도 바로 8·15 직후 친일반민족분자들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정기를 올곧게 다시 일으켜 세우고 역사를 두려워하는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역사의 법정'을 열어야 한다. 그 '역사의 법정'은 친일민족반역자들의 죄상을 새롭게 단죄하면서, 그들처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도 치욕이 돌아가도록 해야 하며, 독립투사나 그 유족에게는 실질적으로 '명예'를 찾아 줘야 한다. 친일파 단죄 문제는 소급법까지는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상을 낱낱이, 그리고 끊임없이 거론함으로써 그 후손들이 고개를 들고 살 수 없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몰아가는 방법밖에 없겠다. 그러나 독립투사의 유족들에 대한 보상은 문제가 다르다. 적어도 친일파의 자손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생활정도는 독립투사 유족들도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거나 월드컵 축구 본선에만 진출해도 생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아닌가?
'역사의 법정'에서 '재심'해야 할 것이 또 있다. 우리 민족사의 발전방향이 민주화와 민족통일에 있다면 '단정 수립' 이후 4·19, 5·16, 5·17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현실의 법정'에 섰던 인사들을 역사의 이름으로 복권시키고 보상하는 작업이다. '역사의 법정'은 반드시 몇십 년 전 일만 다루는 게 아니다. 광주학살을 비롯한 5공 비리에 대한 '역사의 법정'이 현재 진행중이다. 우리는 이 '역사의 법정'이 뒷날 다른 '역사의 법정'에서 심판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 하나 '현실의 법정'과 '역사의 법정'의 괴리 문제는 '현실의 법정'이 '역사의 법정' 쪽으로 거리를 좁혀가야 한다는 것이 정답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의 두려움'을 아는 법관들이 진실로 “법과 양심에 따라 심판할 수 있도록” 법원의 독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국가보안법 피의자들에 대한 집행유예 선고나 인신구속에 신중을 기하려는 법원의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법관은 실정법을 판단의 기초로 할 수밖에 없는 만큼, 실정법에 도사리고 있는 반역사적·반민주적 요소들이 제거되어야만 한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현재 국회에서 거론되고 있는 국가보안법, 안기부법, 노동법, 교육관계법 등 비민주적 악법들을 제대로 개폐하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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