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6 16:27
수정 : 2018.05.16 16:27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9년 12월 6일 한겨레신문 5면 ‘아침햇발’
장윤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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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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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의 유럽순방 기간중 5공 청산의 기본공식을 마련한다는 민정당 집행부의 노력이 끝내 좌절되는가 싶더니 막판에 '문제의 인물' 정호용 의원으로부터 해결의 '실마리'(?) 비슷한 것이 나왔다.
5공 청산 핵심인물로 야당으로부터 공직 사퇴의 압력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정 의원은 2일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함께 퇴진하거나, 아니면 본인의 의원직 사퇴만으로 5공 문제가 완전히 정리된다는 보장이 있으면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함으로써 지금까지 '김 총재 동반사퇴 아닌 공직사퇴 절대 불가'의 입장에서 한걸음 물러선 것이다.
정 의원은 '동반퇴진'과 '5공 청산 축소처리 선보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여야 정치권에 요구하고 나선 것인데, '동반퇴진'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볼 때 정 의원이 노리고 있는 것은 '축소처리 선보장'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정 의원은 축소처리와 관련해서 인적·법적 청산을 자신의 사퇴로 끝내고 더이상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묻지 않으며 전직 대통령 전두환 씨는 '증언 없이'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이런 조건에 대해 “노 대통령과 3김 씨가 텔레비전 생중계로 이런 합의사항을 밝혀야 한다”는 꼬리를 달고 있다.
정 의원의 조건부 제의는 따지고 보면 너무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5공 청산에 관한 3야당의 최종타협안이 '5공 핵심인물 6명의 처리와 전직 대통령 전두환·최규하 씨의 증언'이고 보면, 정 의원 한 사람의 공직사퇴로 나머지 핵심인물들에 대한 처리를 종결시킬 수 있는가도 문제이지만 더욱 큰 문제는 전직 두 대통령 특히 전두환 씨의 국회 증언 없이 5공 청산이 끝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백담사에 가 있는 전두환 씨는 지난달 23일 '몽진(蒙塵) 1주년'을 기념하는 떠들썩한 법식을 전후해서 '말로써 말이 많은 인물임'을 다시 한번 증명해 주었다. 전씨는 “당장 산을 내려가 손봐주고 싶은 사람이 네댓명 있지만 불가의 '인과법'을 생각해서 참고 용서해주고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나야말로 '5공 핵심인물'이자 '최고 책임자'이니 처단이건 처리건 나를 상대로 하고 내 부하였던 사람들은 손대지 말라”고 '우두머리 기질'을 십분 발휘하기도 하고 “국회 증언은 녹화중계보다 생중계가 좋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은둔생활' 1년을 넘기도록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또는 않고) 있는 '6공 핵심세력'에 대한 원망과 협박, 그리고 선량하고 '잊기 잘하는' 국민들의 동정을 노린 전 씨의 계산된 언행은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지 않았고 아직도 대통령인 줄 착각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분노를 다시 한번 불러일으켰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 의원이 굳이 '전두환 씨의 증언 면제'를 조건으로 달고 나온 것은 사태를 해결하기보다는 '버티기 작전'의 또 다른 방법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전 씨의 증언 없이 5공 청산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민정당은 '서면질문·비공개증언·보충질문 1회 허용' 방안을 전 씨 쪽에 제시하고 그 반응을 타진하고 있다. 전 씨 쪽은 “증언문제는 내용과 시기, 방법 등 절차문제에서 여야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는 종전의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말하자면 전 씨의 증언은 “그것으로써 5공 청산이 마무리되어야 하며 새로운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선보장'을 요구하는 것으로, 마치 '폭탄성 발언'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텔리비전 생중계 증언' 주장도 '선보장'을 확보해 내기 위한 공세에 불과한 것 같다.
그렇다면 녹화방송이건 생방송이건 전 씨의 증언은 새롭고 특별한 내용을 담기보다는 요식행위에 그칠 가능성이 큰데, 그런 우려를 확인시켜 주는 또 다른 증좌가 있다. 5공 핵심중 세번째 가라면 노여워할 장세동 씨의 발언이 그것이다. 열달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나오면서 마치 독립투사나 된 듯 “가장 큰 복수는 용서”라고 '기염'을 토해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던 장 씨는 백담사에 가서 전 씨를 만나고 돌아와 “전두환 전 대통령은 광주사태에 책임이 없다”는 폭탄 발언을 함으로써 다시 한번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장 씨의 주장에 따르면 “80년 5월의 광주사태는 제5공화국이 들어서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전 씨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장군'은 특전사령관 '정호용 장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수직관계가 아니라 군 위계상 대등한 수평관계에 있었다고 군출신다운 '논거'를 댔다. 그러나 정호용 의원은 당시 육본 작전명령에 따라 지휘권을 넘겨주었을 뿐이라고 '면책'을 주장한다.
'12·12'에서 '5·17'을 거쳐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중핵'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정권 장악의 절정을 이루는 광주학살에 대해 이들 '실세' 가운데 아무도 책임이 없다면 당시 국군통수권을 가지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인가?
일이 이쯤 되면 이제는 당시 대통령 최규하 씨가 입을 열어야 할 차례이다. 80년 5월 중동 순방길에서 급거 귀국하여 알게 됐던 5·17 쿠데타의 진상은 무엇이며, 8·15 광복절 경축사를 낭독한 바로 다음날 갑작스럽게 '하야'해야만 했던 사정은 무엇인가? 최규하 씨는 전직 대통령이 국회에서 증언한 선례가 없다는 '의전'상의 문제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국정에 책임을 지는 전직 대통령의 '선례'를 만들어 내야 한다. '태어나서는 안 될 정권'인 제5공화국 생성에 자의든 타의든 관여했던 최 씨는 역사 앞에 입을 열어야 한다. 그래서 전두환 씨도 이번만은 실체적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한다. 그것만이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 대통령을 역임한 공인 최규하 씨가 최후, 최대로 국가에 봉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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