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6 17:16
수정 : 2018.05.16 17:16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90년 1월 24일 한겨레신문 5면 ‘아침햇발’
장윤환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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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환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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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에서 일고 있는 민주화의 돌개바람으로 공산정권이 잇따라 무너지자 기대에 부풀어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공산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망명길에 오른 동유럽 옛왕실의 후예들이 그들이다. 최근 외신은 왕정복고를 꿈꾸고 있는 루마니아의 미카엘 전왕과 불가리아의 시메온 전왕, 그리고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있는 알바니아의 레카1세와 헝가리의 오토 대공의 근황을 흥미 있게 전하고 있다.
1947년에 퇴위당한 뒤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잇는 루마니아의 미카엘 전왕은 차우셰스쿠가 처형당한 직후 새 정부에 귀국허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마르가레타 공주와 소피아 공주에게는 귀국이 허가되어 망명지에서 태어난 그 자매는 난생처음으로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두 공주가 어떤 자격으로 귀국을 허용받았는지는 당장 알려진 것이 없다.
독일 호엔촐레른 왕가의 후예인 미카엘 전왕은 6살 때와 19살 때 두 번에 걸쳐 루마니아의 국왕 자리에 오른 적이 있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다. 그는 1927년 부친 카롤이 루마니아 영토를 재통일한 뒤 조부인 페르디난드 1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의 나이 6살 때였다. 그러나 부친 카롤은 3년 뒤인 1930년에 국왕 미카엘을 왕세자로 끌어내리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0년 뒤인 1940년에 국왕 카롤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소련과 헝가리에 할양했다가 국민 봉기로 퇴위를 당했고 다시 미카엘이 국왕이 되었다. 국왕 미카엘은 2차대전 초기에 독일과 동맹을 맺었으나 1944년 친나치 정부를 해체하고 연합군 쪽으로 동맹 관계를 바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뒤에 공산정권에 의해 퇴위를 강요당하고 말았다. 고국 루마니아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미카엘 전왕은 "국민이 허용한다면 부쿠레슈티로 돌아가 정권을 인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미카엘 전왕과 마찬가지로 6살 때 왕위를 물려받았던 불가리아의 시메온 전왕도 스페인에서 40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1943년 부왕 보리스 3세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시메온은 1945년 공산정권에 의해 투옥당한다. 1년 뒤에 이집트로 망명한 그는 스페인으로 거처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52살인 시메온 전왕은 망명 중인 불가리아 예술인 등 반체제 인사들을 정규적으로 만나고 있으며 수도 소피아의 공산당지도층과도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왕정복고는 국민화합을 이룰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면서 "불가리아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왕정복고가 긍정적"이라고 주장한다. 사업가로 성공한 시메온은 친구인 스페인 카를로스 국왕의 경우에 비춰 그 자신도 불가리아 국왕 자리에 복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독재자 프랑코 장군이 사망한 뒤 1975년에 왕정이 복고되었는데, 40년 전에 있었던 내전으로 심각하게 분열된 스페인의 민주화에 왕정이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시메온 전왕은 "불가리아 국민들도 스페인의 전례를 참고할 것"이라며 기대를 걸고 있다.
동유럽의 개혁 열풍 앞에서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는 알바니아의 강경 공산정권이 하루 빨리 무너지기를 멀리 아프리카에서 학수고대하는 사람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레카 1세가 바로 그 사람인데, 1939년 독일과 이탈리아의 침공군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난 보그왕의 아들인 그는 알바니아 왕위 계승권자로 자처하고 있다. 난 지 이틀밖에 안 된 갓난아기의 몸으로 망명길에 올라 아프리카에 정착한 50살의 이 '왕자'는 "동유럽의 마지막 스탈린주의 보루를 무너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벼른다. 그리스 등 이웃 나라를 거쳐 알바니아로 밀반입되는 지하신문에 '민중봉기를 준비한다'는 메시지를 실어 보내기도 한 레카 1세는 민중봉기의 성패 여부는 군대와 비밀경찰에 달려 있다고 진단하고 "국민과 군대는 궁극적으로 손을 잡겠지만 다소간의 조정이 필요하다"고 내다보기도 한다. 그는 국민들이 원하는 정부형태를 선택할 수 있도록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공약하는가하면 알바니아가 국가 복지제도와 자유기업 체제를 겸비한 국가로 발전하기를 희망하기도 한다.
또한 헝가리 사태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으로 오토 대공을 들 수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예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제 칼 1세의 아들이자 프란츠 요셉 황제의 손자인 오토는 헝가리의 국정이 비교적 안정되어있기 때문에 왕정복고의 가능성에 그다지 큰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온 세계는 동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 대변혁을 놓고 대체로 두 갈래 방향에서 앞날을 전망하고 있다. 첫째는 사회주의는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에 동유럽 국가들은 자본주의 사회로 대거 편입될 것이라는 시각이다. 두번째 시각은 공산당 주도와 중앙계획경제를 특징으로 하는 스탈린주의가 실패했을 뿐이므로 동유럽국가들은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복원해 낼 것이라는 입장이다. 두 전망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은 아무도 '왕정복고' 같은 것은 고려조차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오직 국민을 위해 발전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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