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6 17:54
수정 : 2018.05.16 17:54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90년 6월 12일 한겨레신문 12면 ‘아침햇발’
장윤환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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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환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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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3주년 계승 결의대회'가 지난 10일 서울·광주·대구를 비롯한 전국 12개 도시에서 열렸다. 서울의 경우 '민중·민주열사 합동 추모제'를 겸한 '6·10 계승대회'는 예정된 집회 장소였던 연세대가 경찰에 '원천봉쇄'되는 바람에 성균관대로 옮겨 열렸다. 국민대회에 참석한 학생·재야인사·시민 등 3천여 명은 '민자당 분쇄'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경찰과 격렬하게 맞섰다.
'민중의 위대한 승리'로 평가되었던 그 뜨거운 87년 '6월'로부터 3년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굳이 달라진 것을 들자면 시위군중의 구호가 '호헌 철폐'와 '전두환 정권 퇴진'에서 '민자당 분쇄'와 '노 정권 타도'로 바뀐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본질이 결코 달라지지는 않았다.
5공화국 헌법 개정을 둘러싸고 여야 간에 공방이 치열하던 87년 4월 당시 대통령 전두환 씨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대통령 직접선거를 열망하던 국민들은 개헌의 당위성을 공언한 전두환 씨의 '표변'에 크게 분노했다. 민정당 정권은 '호헌 철폐'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하며 곳곳에서 일어나는 국민들의 저항을 짓밟으며 5공 헌법에 따라 '정부 이양' 절차를 밟아갔다. 5공의 학정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절정에 이른 무렵 '박종철 씨 고문살인 축소·은폐 조작'이 폭로되었다.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인데 국민을 우습게 본 정권은 '4·13 호헌조치'가 관철된 것으로 착각하고 6월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씨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려 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모인 국민들은 '6·10 민정당 전당대회'를 저지하기 위해 같은 날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20개 지역에서 일제히 열었다. 전국 경찰에 6·10 갑호비상이 걸리고 수만 명의 경찰이 수십만 민주시민들을 '진압'했다. 연세대 학생 이한열 씨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것도 바로 그 전날의 시위에서였다.
6월 10일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씨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고 “정부 이양과 88 올림픽 '양대사' 이후 내각책임제 개헌을 관철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날로부터 보름이 넘게 시위와 농성이 그치지 않았다. 연인원 70만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전국에서 1만2천6백86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호헌 철폐'와 '전두환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의 함성이 전국을 뒤덮자 5공의 핵심세력인 신군부는 기동력 있게 응급처방을 짜냈다. '6·29 노태우 선언'이 바로 그것이었다.
“대통령직선제 개헌 연내 실현, 김대중 씨 사면복권, 구속자석방, 언론기본법 개폐, 지방의회 구성, 대학과 교육의 자율성 보장” 등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은 '노태우 항복선언'으로까지 미화되는 가운데 한동안 신통력을 발휘했다. 직선제 개헌과 언기법 폐지, 사면복권이 잇따르는 가운데 국민들은 '유화정책'의 속셈을 의심하면서도 일단 경계심을 풀었다. 김대중 씨를 복권시킴으로써 '1노 3김'의 4파전을 노린 신군부의 전략에 따라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직을 '전취'했고 육사 동기생 사이에서 정권이 이양되었다. 88년 4월 총선에서 국민의 뜻에 따라 '여소 야대'의 4당 구조가 편성되었으나 집권세력으로서는 큰 문제가 못되었다. 88올림픽을 전후한 '유화국면'을 넘기고 지난해의 공안정국을 통해 본질을 드러낸 6공의 집권세력은 형식적으로 '5공 청산'을 끝내자마자 민정·민주·공화 3당을 통합함으로써 민자당이라는 거대여당을 만들어버렸다. '6·29 선언'으로부터 채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끝낸 '작전'인 것이다.
물가와 전·월세값 폭등, 부동산투기, 분배 왜곡과 경제력 집중에 따른 빈부의 격차 심화 등 민자당 출범과 맞물려 더욱 악화된 위기를 정부 스스로가 '총체적 난국'으로 규정하는 가운데 내각제 개헌 조기추진설이 불쑥 튀어나왔다가 '시기상조론'으로 바뀐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다. 지난 5월 하순 분분한 여론을 무릅쓰고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은 6월 초 미국으로 날아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극적인 회담을 가진 데 이어 부시 미국 대통령과도 만나서 북방외교를 정치적 홍보에 한껏 활용했다. 그는 <한국일보>와의 회견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에 관해 주목할만한 발언을 했다. 노 대통령은 “헌법은 국민의 뜻에 따라 개정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지금은 나라 안팎으로 대응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기 때문에 개헌을 논의할 시기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역시 '거론 시기상조론'인 것이다. '6·29 선언' 때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공약하면서도 “의원내각제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제도라는 생각에 변화가 온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던 사실을 새삼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부와 민자당이 통일원을 행정부 소속에서 대통령 직속의 독립부서로 확대·개편할 방침이라는 보도가 눈길을 끈다. 정부·여당은 군조직법을 통합군제로 개정하여 군을 사실상 대통령의 직속 통제 아래 두기로 방침을 이미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들로 미뤄볼 때 노 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는 내각제 개헌은 대통령이 외교·안보·국방·통일업무를 관장하고 일반행정은 국무총리가 맡는 이원집정부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현 정권은 북방외교의 '성과'를 내세워 국민을 설득하는 가운데 유리한 시점을 골라 언제든지 내각제 개헌을 추진할 수도 있다.
문제는 국민들의 생각이다. 87년 6월항쟁으로 힘겹게 얻어낸 대통령직선제가 6공화국이 끝나기도 전에 내각제로 바뀔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합당한 여당의 밀어붙이기식으로 말이다. 87년 6월의 그 뜨거운 함성은 '대통령직선제'였지 '내각제'는 분명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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