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6 18:09
수정 : 2018.05.16 18:09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90년 7월 11일 한겨레신문 12면 ‘아침햇발’
장윤환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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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환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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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수도 본 시가를 오가는 차량들은 '야 쭈 본'이라는 스티커를 달고 다닌다. “본에 찬성표를!” 정도로 번역될 법한 이 스티커는 독일이 통일된 뒤에도 수도로 남아 있고 싶어 하는 본 시민들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베를린 시가를 질주하는 차량들의 스티커 '독일 수도 베를린'에 비해 본 쪽의 주장은 어쩐지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통일독일의 수도를 본으로 정하자는 사람들은 베를린이 프러시아제국과 히틀러의 제3제국을 상징하는 데 반해 본은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전통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라인 강가에 자리 잡은 인구 30만의 본은 실제로 지난 40년 동안 독일연방 제도의 이상적인 수도로 기능해왔다. 서독의 초대 수상 아데나워가 본을 수도로 정한 것은 그가 라인란트 출신이어서만이 아니라 서독이 서방의 민주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긴밀한 유대를 가져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데나워의 이런 구상은 인접 국가들이 서독에 대해 품고 있는 공포를 잠재워 주는 데 기여했고 그 때문에 현재 진행 중인 독일통일은 순조로울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본을 수도로 정하자는 사람들은 또한 정치적 이유 말고도 재정적인 이유를 들고 있다. 본에서는 현재 20억 마르크(12억 달러)를 들인 대대적인 건설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길 경우 막대한 예산을 헛되이 버리는 셈이 되며 정부청사 이전에만도 1백10억 달러가 추가로 소요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수도 이전으로 현재 본에 살고 있는 공무원, 외교관, 신문기자, 로비스트 등과 그 가족 약 10만여 명이 빠져나감에 따른 집값·땅값 하락과 서비스업종의 위축도 계산에 넣고 있는 것 같다.
이와는 달리 베를린 시민들의 주장은 훨씬 힘차고 당당하다. 베를린 시민들은 “시카고 공동묘지의 절반밖에 안되는 규모에다 인구 30만이라야 그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들의 2배 정도에 지나지 않는 본이 어떻게 감히 국민 8천만 명을 포용하는 통일독일의 수도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베를린 인구는 현재 서베를린 3백만, 동베를린 1백만이며 머지않아 2백만 정도가 늘어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서베를린의 발터 몸퍼 시장은 “통일독일의 수도가 베를린이 될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한다. 무게중심은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폴란드, 체코, 헝가리가 유럽공동체에 속하게 될 경우 베를린은 유럽대륙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통일독일의 수도로 베를린을 지지하는 정치지도자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바이츠제커 서독 대통령과 드 메지에르 동독 수상은 물론 '동방정책'을 창안하고 실천했던 서독 수상이자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가 그들이다.
정치인들은 그렇다 치고 어느 나라에서건 남보다 앞장서 대세의 감을 잡는 건 장사꾼들이다. 베를린을 향한 대이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서독 최대의 자동차 생산업체인 다이믈러 벤츠사는 서비스사업 부문의 총본부를 베를린의 포츠다머플라츠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포츠다머플라츠는 베를린의 심장부였으나 '장벽'이 설치된 이후 40년 동안 '잠자던 거리'였다. 베를린이 아직도 전승 4개국의 '점령지'이기 때문에 서독 항공사는 취항이 금지되어 있는데 루프트한자가 베를린 취항을 준비하고 있다. 외국 상사들도 베를린에 새로운 전진기지를 설치하려 하고 있다. 서독 정부는 새로운 동서국제기관, 예컨대 환경문제연구소나 군축감시기관 등을 베를린에 유치하려 하고 있다.
서독의 언론기관들은 통일독일의 수도와 관련해서 여론조사를 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국민들은 베를린에 찬성하고 있다. 동독인들의 거의 전부가 베를린을 지지하는 것은 물론이다.
통일독일의 초대 수상을 꿈꾸고 있는 서독의 헬무트 콜 수상 또한 베를린을 지지하고 있지만 서독 정부의 공식입장은 오는 12월 동서 양독 동시 총선에서 구성되는 '통일독일 의회'가 수도를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베를린의 몸퍼 시장과 마찬가지로 통일독일 수도의 초대 시장을 노리는 본의 한스 다니엘스 시장은 불리한 입장에서도 일전을 불사할 각오로 있다.
“수도를 둘러싼 싸움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면, 역사는 다윗이 승리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어찌 보면 한가하기까지 한 통일독일의 수도 논쟁을 우리는 언제까지 부러운 눈으로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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