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5.14 16:29 수정 : 2018.05.14 23:00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5월 26일 한겨레신문 1면 '한겨레 논단'

조영래 논설위원·변호사

조영래 논설위원·변호사

“…사회안전법 앞에 서 본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흡사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괴물 앞에 알몸으로 선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비정한 관료체계는 내가 알 수 없는 때에 내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나의 `동태'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나는 그것을 열람할 수가 없으므로 그 보고서가 나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심의위원들은 거의 뻔한 내용인 `동태보고서'를 건성건성 훑어보고는, 아마도 그날 점심식사를 어느 식당에 가서 어떤 메뉴로 해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보안감호처분 2년 갱신을 의결할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또 다시 두 번을 이 싸늘한 한 평짜리 감방에 감금되어 있어야 한다….”

이 글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상황을 묘사한 소설의 한 귀절이었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서준식씨가 1987년 3월 청주 보안감호소에서 집필을 끝내고 서울 고등법원에 제출한 <나의 주장>이란 문서의 첫머리에 나오는 -즉,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의 삶 곁에서, 아니 그 한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징역 7년의 형기를 다 복역하고도 사회안전법이라는 `거대한 괴물' 때문에 자그마치 10년을 더 갇혀 있어야만 했던 서준식씨. 10년 동안 인간이 아닌 하나의 `처분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그 서준식씨가 드디어 석방됐다. 그러나, 수감될 당시에 20대 초반의 앳된 대학생이었던 서씨는 이제 40대의 초로에 접어들었고, 그 사이에 아들의 석방 소식을 하루하루 애타게 기다리던 그의 노모는 세상을 떠났다. 법률의 이름으로 한 인간의 삶이 이토록 처절하게 파괴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제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 사회안전법은 유신체제가 만들어낸 온갖 악법 가운데서도 가장 표본적인 인권탄압법이다. 이 법에 의하면 법무부장관은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으로 복역한 경력이 있는 정치범 전과자들에 대하여 `재범의 위험성'을 근거로 `보호관찰' `주거제한'과 `보안감호' 등 세 종류의 보안처분을 과할 수 있다. 그중 가장 무거운 `보안감호' 처분은 죄를 다시 범할 현저한 위험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를 `보안감호소'라는 이름의 감옥 안에 감금해 두는 처분인데, 그 기간은 `2년'이라고 하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갱신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죄를 다시 범할 현저한 위험이 없으면 될 것' 아니냐 하는 부질없는 반문을 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지금껏 그런 사유로 법원에서 구제를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서준식씨의 <나의 주장>에 보면, 그와 함께 보안감호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평균 나이는 만 63세. 그 대부분이 환자들이고 그 중 70세 이상의 노인만도 열댓명이나 된다. 팔다리가 잘려나간 불구자들도 있고 간암·위장암·뇌낭충증 등 불치병으로 죽기 직전까지 갇혀 있었던 사람들의 참혹한 이야기도 소개되고 있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이런 일을 더 이상 외면할 권리는 없다. 큰 역사의 눈으로 보면 결국 민족 분단의 비극의 속죄양에 지나지 않을 이 보안감호 처분대상자들 `사회안전'을 위협할래야 할 능력조차 없는 이 버림 받은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그들이 누구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인지, 한 명도 공식적으로 밝혀진 적이 없다.

서준식씨는 그들 가운데 바깥세상에 이름이 다소라도 알려진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 책임감 때문에 그는 간단한 `전향서' 한 장만으로 진작 석방될 수도 있었을 것을 끝까지 마다하고 고독과 절망에 몸서리치면서도 온몸으로 사회안전법에 맞서 싸워왔다. 사회안전법은 `개정'될 수 있는 법률이 아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 치고 이런 식의 정치범에 대한 보안처분제도를 두고 있는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사회안전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조영래, 노동자의 친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