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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14 16:34 수정 : 2018.05.14 23:00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6월 9일 한겨레신문 1면 ‘한겨레 논단’

조영래 논설위원·변호사

조영래 논설위원·변호사

오늘내일하면서 벌써 몇 달을 끌어오던 양심수 석방 문제가 요즈음에 들어서면서 참으로 묘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며칠 전 법무부 장관이 “양심수는 없다”고 하는 소신을 밝히고 나선 데 뒤이어, “구속자의 석방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기결수를 매달 말에 실시되는 가석방으로 풀어주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하는 당국의 방침이 신문 보도를 통하여 전해졌다. ‘잘못을 반성하는 기결수’라…. 왕년에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소리 같다. 아니,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면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수시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귀가 따갑도록 듣던 소리인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것이 어째서 마치 까마득한 유성기 시절의 흘러간 옛노래가 어느 날 느닷없이 안방의 브라운관에 다시 등장한 것처럼 그렇게 새삼스럽게 엉뚱하고 어리둥절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이 사십에 벌써 건망증이 찾아든 것인가?

그렇다. 지난 1년간, 6·29 선언이다, 항복이다, 국민화합이다, 민주화다, 새 시대다, 보통사람이다,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다, 원탁이다, 와이셔츠다, 가방이다, 제5공화국 비리 청산이다, 인권이다, 구시대와의 단절이다, 대화정치다, 제도권 수렴이다, 무어다, 무어다 하는, 실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현란한 구호의 홍수 속에 파묻혀 지내는 사이에 나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바로 그 사람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건망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면 나뿐만이 아니라 지금 양심수들에게 ‘반성’을 요구하고 있는 그 사람들도 나 못지않게 건망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그들은 오늘날의 양심수 석방논의가 노 대통령이 6·29 선언에서 시국사범에 대한 전면적인 석방·사면·복권을 공약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6·29 선언은 노 대통령 자신도 인정하였듯이 ‘국민에 대한 항복’의 선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원래 현 집권층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부당하게 탄압해 온 구시대의 잘못에 대한 반성의 표시로써 양심수의 석방을 약속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지금에 와서는 거꾸로 ‘반성하는 양심수의 석방’ 정책으로 쉽게 둔갑할 수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또 한가지. 애초에 그들은 ‘국민 화합조치’의 일환으로 양심수의 석방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광주사태나 제5공화국 비리 문제에 관하여 그들은 ‘국민화합’을 위해 과거의 잘잘못을 들추어낼 것 없이 적당한 선에서 덮어두자고 말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고 온 나라를 들어먹다시피한 그런 엄청난 범죄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대한 태도를 취하면서 어떻게 유독 양심수들에 대해서만은 끝까지 ‘과거의 잘못’을 고집스레 내세우면서 뉘우칠 것은 강요하는가? 이것도 알기 어려운 노릇이다.

‘반성’을 하려는 양심수가 지나치게 적은 것도 걱정거리였던지 ‘반성의 기준을 완화’한다는 기상천외한 발상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 국어를 타락시켜가면서까지 이런 구차한 짓을 할 것 없이 차라리 양심수 석방 약속을 백지화한다고 분명하게 선언하는 편이 떳떳하지 않겠나 생각된다.

그리고 야당들도 아예 그렇게 알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확실한 대책을 세워나가야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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