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4 17:54
수정 : 2018.05.14 22:59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7월 7일 한겨레신문 1면 ‘한겨레 논단’
조영래 논설위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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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논설위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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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결될 것이 기정사실로 굳어진 것처럼 보였던 정기승 대법관에 대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아슬아슬한 차이로 부결되고 뒤이어 '이일규 사법부'가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알 듯 알 듯하면서도 모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힘깨나 쓰고 말깨나 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너도나도 핏대를 올려가며 '백지투표'를 문제 삼고 나서는지 영문을 알기 어렵다. 어떤 일간지에서 백지투표가 '무기명 비밀투표'를 규정한 국회법에 '명백히 위배'된다고 말하는데 국회법 조문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국회법에는 대통령이 환부한 인사에 관한 안건은 '무기명 투표'로 표결한다고만 되어 있다. '비밀투표'란 말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백지투표가 투표의 비밀을 보장하는 '국회법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비난하는데, 국민들의 감시의 눈길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은밀한 이해관계에 따라 '자유롭게' 투표를 하고 싶어 하는 국회의원이 있다면 그에게는 대단히 안된 일이지마는, '국회법의 정신'은 그러한 '투표의 비밀'을 그다지 좋아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국회법상 의원들의 표결방식은 기립에 의한 공개표결이 원칙으로 되어 있고 헌법개정안은 아예 '기명투표'로 표결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과 같이 '인사에 관한 안건'에 예외적으로 무기명 투표를 인정하는 취지는 의원들이 인사대상이 된 당사자에게 불리한 투표를 하더라도 그 당사자와의 사적인 '인간관계'에 흠이 가는 일이 없도록 보호함으로써 공정한 투표를 유도하려는 데 있는 것이지 국민의 감시로부터 투표의 비밀을 지키려는 데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번의 백지투표가 '비민주적'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 민주주의란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눈에는 사법부의 독립과 쇄신을 열망하는 국민의 의사를 외면하고 재조·재야 법조계의 압도적인 반대여론을 짓밟아 가면서 일부 야당과의 '산술적 정치거래'만을 믿고 굳이 무리한 대법원장 인선을 강행하려 한 정부·여당의 태도는 그다지 '비민주적'이 아닌 것으로 비치고, 여기에 맞서서 '공작정치'의 손길을 단호히 뿌리치고 '산술적 정치거래'의 책임소재를 국민들의 눈앞에 분명히 드러내기 위하여 평민·민주 등 야당 의원들이 스스로 선택한 '백지투표'라는 하나의 표결방식만이 그토록 '비민주적'으로 비치는 것인가?
백지투표를 그토록 거세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백지투표를 불가피하게 만든 '산술적 정치거래'의 장본인이라고 할 만한 김종필 총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는 것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김종필 씨는 나에게는 영원한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나는 그를 판단할 수 없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 그는 현 집권 세력을 '고약한 사람들'이라고 매도하였는데 요즈음에 와서 그가 "인사권자의 의사를 존중한다"느니 하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면 현 집권 세력을 그다지 '고약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도 싶고, 오히려 유신 시절에 그가 자주 '통치권자의 고유권한' 운운하던 말만 자꾸 연상이 된다.
대법원장 인선 문제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반드시 우리보다 앞서간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사법부의 실정을 법조인들보다도 더 잘 아는 전지전능한 천재 같기도 하고 삼십 대에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였던 '고독한 선구자'의 면모를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있는 신비의 인물 같기도 하다. '여소야대'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하여는 우선 김종필 씨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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