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4 18:16
수정 : 2018.05.14 22:59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8월 4일 한겨레신문 1면 ‘한겨레 논단’
조영래 논설위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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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논설위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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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3일 인천지방법원에서 문귀동 형사에 대한 유죄판결이 선고됨으로써 '성고문'이라는 신조어를 낳은 이 전대미문의 패륜적인 공권력 범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판결에서 인천지방법원은 조영황 지정변호사가 권인숙 씨의 고소 사실을 그대로 인용하여 작성한 공소장 내용을 전부 사실로 인정하였다.
이로써 권인숙 씨의 폭로 내용이 한치의 틀림도 없는 진실이었음이 2년 남짓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국가에 의해 확인된 것이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권인숙 씨의 승리이며 또한 진실을 요구한 국민의 승리이다.
그러나 국가는 이것으로써 면죄되었는가? 문 형사 한 사람을 감방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그 책임을 다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국가가 이 사건을 정당한 방향으로 해결하고 공권력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마땅히 취하여야 할 일련의 조치의 시작일 뿐이다. 권인숙 씨의 폭로 내용이 전부 진실임을 인정한 이상,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동안 국가가 저질러 온 숱한 과오를 재조명해 보고 일일이 시정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검찰이 이 사건에 관하여 1986년 7월 16일 발표한 수사결과 내용을 스스로 시정하는 일이다. 당시 검찰은 문귀동의 폭언과 폭행, 즉 "티셔츠를 입은 가슴 부위를 손으로 3~4회 쥐어박은" 폭행 사실만이 인정될 뿐 '성적 모욕행위' 부분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하였다. 이제 그 발표 내용이 허위였음이 명백히 드러난 이상 검찰로서는 마땅히 스스로 그 허위 발표 내용을 철회하고 어째서 그런 허위 발표를 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밝히고 관계자의 인책과 국민에 대한 사죄 등 후속 조치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 검찰이 아직 이것을 하지 않고 쓰다 달다 말 한 마디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대체 국민 알기를 어떻게 알고 그러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법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째서 재정신청을 기각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인지 해명하고 책임소재를 밝혀야 옳다고 생각한다.
검찰이나 법원이 저지른 그 뼈아픈 과오의 배후에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세간에 알려질 대로 알려진 일이다. 이 사건의 내막을 다소 짐작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로서 단언하건대, 이 사건 수사검사들이나 재정신청 담당 법관들 가운데는 진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숨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 없지 않았고, 만약 '관계기관 대책회의'의 압력이 없었더라면 검찰의 명예와 법원의 신망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토록 처참하게 짓밟히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것을 못내 애석하고 분하게 여긴다.
'관계기관 대책회의'의 정체는 여전히 막막한 안개 속에 휩싸여 있다. 이것이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는 한 사법부의 독립과 검찰의 중립을 기약할 수 없으며 우리들의 인권을 위협하는 구시대의 악몽은 사라지지 않는다.
'관계기관 대책회의'의 정체를 밝혀낼 주된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법원이나 검찰의 관계자들이 '양심선언'을 통하여 그 정체의 일단을 폭로할 것을 기대해 볼 수도 있고 정부가 스스로 밝히는 것을 기대해 볼 수도 있으나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국정조사권을 가진 국회가 의당 이 일을 해내야만 한다. 감히 말하건대 이것을 방치하는 것은 국회의 직무유기이다. 지체없이 국정조사권을 발동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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