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4 18:28
수정 : 2018.05.14 22:58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9월 1일 한겨레신문 1면 ‘한겨레 논단’
조영래 논설위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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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논설위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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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을 컴컴한 동굴 속에서 헤매다가 밝은 바깥세상으로 빠져나올 때는 조심조심 눈을 뜨지 않으면 갑자기 햇빛을 쏘여 눈이 멀어 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햇빛이 눈부시다고 해서 뒷걸음질 쳐서 다시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 가려고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짓이 없다. 지금 우리는 길고 지루했던 구시대의 어둠을 지나 막 민주주의의 눈 부신 햇살이 비치는 새 시대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역사적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낡은 질서에서 새로운 질서로 옮겨가는 하나의 과도기이며, 이런 엄청난 변화의 시기에 수반되기 마련인 온갖 복잡다기한 갈등과 분규와 진통은 끊임없이 우리들의 국민적 지혜와 인내력과 도덕적 용기를 짓궂은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다. 이 시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되돌아가자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어둡고 축축한 과거의 동굴이 지내기가 좋았던 것이다.
요즈음 느닷없이 대두되고 있는 '우익궐기'론이나 그와 맥이 닿은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체제수호'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그 주창자들이 표방하는 것처럼 '좌익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주화의 도전으로부터 구체제를 방어하려는 움직임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된 사람이 적지 않을 줄로 생각한다. 유신체제와 광주항쟁, 그리고 제5공화국을 통하여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암담한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을 때 이 '우익의 대변자'들은 어디에 있었던가? 그때 그들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우익의 궐기'를 부르짖은 적이 있었던가? 내 기억으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민주화의 희망이 가까스로 소생된 오늘에 와서 도리어 어떤 위기의식을 표출시키며 '체제수호'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광범위한 민주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를 압살해 온 구체제로의 복귀를 꿈꾸는 '극우' 세력의 궐기를 선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들이 말하는 '좌익'의 개념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과거의 동굴의 어둠침침함 속에서 모든 사회현상을 좌·우 양극의 대립으로 해소시켜 버리는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어 온 사람들의 눈에는, 오늘날 분출하고 있는 새로운 모든 것, 현상 변화를 지향하는 모든 것―심지어는 지난 대통령 선거 때의 여당의 집권 공약에 포함된 것들까지도 '좌익'적인 것으로 비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치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좌익' 현상이 과연 그동안 '우익의 궐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던가 하는 물음이다. 역대 정권이 막대한 국가 예산을 '체제유지비'로 소모하고 초법규적인 공권력을 휘두르면서 각계각층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좌경 용공'으로 몰아 '극우적 탄압'을 일삼아 온 것이 유신 때부터만 쳐도 근 20년이 되었다. 그랬는데도 결과적으로는 있던 '좌익'이 죽은 것이 아니라 없던 '좌익'이 도리어 생겨난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좀 달리 생각해 볼 때도 되지 않았는가? '우익'이 '좌익'에 맞서서, '이론가는 이론으로, 조직가는 조직으로' 싸우라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완력가는 완력으로' 맞서 싸우라는 것은 대체 웬 말이며, 또 이 같은 '우익테러' 주장을 편 글을 명색이 치안 질서 유지의 책임자인 내무부 장관이 10만 부씩이나 인쇄하여 산하 공무원들에게 배포한 의도는 무엇인가? '우익'의 도덕적 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이런 구시대적 행태가 어째서 아직까지도 계속 '돌출'하고 있는 것인지, 올림픽을 앞두고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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